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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3) / 종교개혁의 진행과 30년 전쟁 > 한상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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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3) / 종교개혁의 진행과 30년 전쟁 > 한상인 목사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3) / 종교개혁의 진행과 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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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1-02-09 11:10

본문

 

종교개혁의 기치를 휘날린 1517년 이후 유럽의 기독교는 자리매김을 위해 몸부림을 쳤다. 로마가톨릭교회의 박해도 박해였지만, 개신교끼리 교파 간의 갈등도 큰 비극이었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종교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전쟁이 일어난 것인데, 그 이면에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


1. 유럽의 종교개혁 운동

 

1) 독일에서 벌어진 종교 갈등

 

1522년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따르는 라인강 하류 지역의 기사들이 “형제단”을 세우고 신성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그 후로 루터교회로 개종하는 도시들이 늘어났다. 독일의 영주들은 로마 가톨릭교회를 버리면 기존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재산들을 압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루터교회나 장 칼뱅의 개혁교회로 개종하는 영주들이 늘어갔다. 마침내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독일 내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간의 타협이 체결되었고, 루터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2) 스위스의 츠빙글리의 개혁 운동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스위스의 빌트하우스에서 출생하였으며, 1517년에 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는 1520년 사상의 자유를 위해 교황청의 수당을 포기하고, 신부가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자유를 줄 것을 건의하였다. 1523년 취리히시 정부청사에서 열린 변론회에서 67개조를 발표하였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으며, 교황제도와 성인숭배, 성직자 독신제, 면죄부, 고행, 연옥 등을 비판했다. 츠빙글리는 성경의 권위와 이신득의에 있어서 루터와 의견이 일치하였으나, 성찬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달랐다. 1531년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연방정부와 개혁 세력이 전쟁이 일어났고, 츠빙글리는 군대를 따라 출정했다가 전사했다.

 

2. 사회와 이반된 재세례파

 

1) 재세례파(Anabaptist)의 형성

 

재세례파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세례만을 고집하는 교파를 일컫는다. 그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벌려 교회에서 그림과 형상을 제거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주장했다. 또한 성경의 연구에 관심을 두었으며, 사도들의 신경이나 교회의 조직에 관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루터와 츠빙글리의 정교연합을 반대했으며, 형식화된 조직과 성직자 계급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성직자란 성경을 연구하고 믿는 자들을 감찰하고 성회를 인도하며 신자들의 영적 상황을 보살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재세례파의 박해

 

16세기 일반적인 정교연합의 상황에서 재세례파는 정치적 분리를 주장함으로써 대다수의 교파의 적이 되었다. 독일에서 재세례파는 아우크스부르크 조약 내용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탄압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이 재세례파를 조롱하며, ‘침례를 원하는 사람들로 물에 빠져 죽게 하라’고 하였다. 실제로 많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익사 당하거나 피살되었다.

 

3) 이단으로 정죄된 재세례파

 

극단적인 재세례파 사람들이 사회적 종교적으로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켰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토마스 뮌쩌는 폭동 선동과 교회 재산 몰수 등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았다. 멜키오르 호프만은 종말사상을 주장하여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며, 1533년 스트라스부르로 그리스도가 강림한다고 주장하였다. 호프만의 예언이 빗나가자 그의 신도였던 얀 마티스는 참된 새 예루살렘이 네덜란드의 뮌스터라고 선포하였다. 그는 뮌스터에 성도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정부와 종교, 사회의 큰 지탄을 받았다. 반면에 온건한 재세례파들도 많이 있었으나 비사회적인 활동으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3. 30년 종교전쟁과 평화조약

 

1)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의 성격

 

이 전쟁은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를 따르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다. 1618년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개신교도를 탄압한 것을 반발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전쟁 기간은 네 시기로 구분되는데, 앞의 두 시기(1618-1620년, 1625-1629년)는 종교적 성격이 강했고, 나머지 두 시기(1630-1635년, 1635-1648년)는 유럽 국가 간의 이권 싸움의 성격이 강했다. 

 

2)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falen)의 결과

 

이 조약으로 국가 간의 영토문제와 종교문제가 타결되었다. 루터파를 인정하는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1555)이 추인되고, 종교적 관용 조항들을 개혁교회(칼뱅주의)까지 확대 적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제국 내에 가톨릭과 루터교 및 개혁교회의 3대 종교공동체가 용인되었다. 독일의 경우 국토가 황폐화되고 인구가 크게 떨어졌으며, 신성로마제국 황제들과 독일 제후들 사이에 지속되어온 투쟁이 끝나고, 여러 연방국가로 나뉘게 되었다. 이 조약은 독일의 기본법으로 인정되었으며,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모든 조약들의 근간을 이루었다.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각각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고, 프랑스와 스웨덴은 영토가 늘어났다. 30년 전쟁은 처음에는 종교의 이름을 빌린 민족 간 대립이었으나, 점차 국가 간 패권투쟁이 된 전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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