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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 (3) / 8세기 영국 교회 > 한상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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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 (3) / 8세기 영국 교회 > 한상인 목사




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 (3) / 8세기 영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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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0-03-30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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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전반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한 이슬람교는 그 다음 1세기 동안 북아프리카, 팔레스타인, 소아시아 등을 무력과 종교로 정복해나갔다. 마침내 스페인을 뚫고 유럽으로 교세를 확장하려 할 때 영국 교회의 베데와 보니페이스가 등장해서 복음의 빛을 발했다.


1. 영국의 가경자 베데


1) 베데(The Venerable Bede, 672-735년)의 생애

베데는 잉글랜드의 노스엄브리아에서 태어났다. 7세 때 부모에 의해 수도원에 맡겨져 19세 때 집사가 되고, 30세에 사제가 되었다. 그는 앵글로색슨 문화가 번창하고 있던 잉글랜드 북부 재로우에서 거의 전 생애를 보냈다. 그의 성자 같은 삶 때문에 가경자(可敬者, Venerable) 베데라고 불렸다. 그는 735년에 죽었으나 1899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그를 신성한 박사로, 1935년에는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2) 학문적 업적

베데는 교부시대와 카롤링 왕조의 학문 부흥기 사이에 살았던 가장 주요한 학자요 교사, 저술가였다. 그의 탁월한 업적으로 인해 600-800년의 기간을 ‘베데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의 문헌은 대학이 발생할 때까지 수도원 교육을 지배하였다. 말년에 저술한 ‘잉글랜드 민족 교회사’는 초기 잉글랜드와 로마의 역사부터 731년 켄터베리 대주교의 사망시까지 잉글랜드의 국가조직을 잘 기술하고 있다. 그는 성경주석을 집필하였으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제롬의 글을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연구와 교육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예배나, 수도사로서의 노동의 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3) 로마식 기독교의 수호자

당시 영국에는 두 계열 기독교가 대립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는 이전부터 들어온 켈트족의 기독교가 널리 퍼졌다. 또한 앵글로색슨에는 로마 교황 대그레고리에 의해 유입된 라틴계 기독교가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베데는 두 기독교의 대립에서 로마 편에 서 있었다. 하지만 양자의 차이는 교리보다는 관습에 있었다. 한 가지 예로 수도승들의 삭발 논쟁을 들 수 있다. 광야에서 시작한 수도원에서는 물이 귀했기 때문에 머리를 삭발하였다. 그런데 머리의 주변을 삭발하고 중앙을 남겨두는 켈트계의 방식과, 머리 중앙을 삭발하고 주변머리를 남겨두는 라틴(로마)계 방식이 갈등을 빚었다. 그런데 앵글로색슨계 왕의 지지로 인해 로마식 삭발이 주류가 되었다. 


2. 독일 선교사 보니페이스


1) 보니페이스(Boniface, 672/5-754년)의 생애

그는 잉글랜드 색슨족의 왕국에서 윈프리드(Winfrith)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는 40세가 될 때까지 색슨족의 수도원에서 교사와 시인, 문법가로 살고 있었다. 당시 게르만족들에 대한 선교에 관심이 많아지고 있었는데, 그는 네덜란드 지방에서 선교사가 박해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듣고 유럽으로 선교의 길을 떠났다. 그의 첫 선교사역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곧 영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몇 년 후 그는 선교사역에 공식적인 후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로 가서 교황의 인준을 구하였다. 교황은 이슬람의 세력이 확장되는 시대에 선교사의 인준을 구하는 윈프리드를 가상하게 여겨 보니페이스(보니파티우스)라는 로마 귀족 이름을 하사했다. 그는 탁월하게 독일 선교사역을 수행하다가 여든이 된 무렵 이교도들이 대부분인 북쪽으로 선교여정을 떠났다. 그는 754년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를 흔히 ‘독일인들의 사도’라고 부른다.


2) 용맹스런 선교사

그는 프리시아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박해하던 프리시아의 왕이 죽은 후 그는 독일의 헤세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헤세에서 그는 우레의 신 토르를 섬기는 이교도들이 신성시하던 도나(Donar)의 참나무를 베어 근처에 성베드로 교회를 세웠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은 독일 가톨릭계에 호전적인 성격을 주게 되었으며, 나중에 중세 기독교의 기사도와 군사 단체에 반영되었다. 헤세에서 성공한 보니페이스는 지금의 동부 독일로 진출하였다. 거기에서 영국 선교사들과 함께 교회의 부패현상을 제거하는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3) 수도원 건립

그의 대부분의 사역은 수도원을 세우는 일이었다. 수도원들은 경건과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744년에는 독일의 로마 가톨릭의 영적 중심지인 풀다(Fulda) 대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그는 카롤링 왕가의 피핀(Pepin)이 프랑크족의 왕으로 승인받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로써 프랑크(후의 프랑스) 왕국은 천년 동안 자신들의 신적 권위를 자랑하게 되었다. 반면에 황제들의 등극에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교황이 은연중에 그들보다 권위를 가진 것으로 비쳐지게 되었다.


4) 평가

그는 유럽에 복음을 전한 수많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앵글로색슨의 선교사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어떤 사람들보다 더 많은 개인들을 회심시켰을 뿐만 아니라, 로마 교황을 프랑크의 왕들과 독일 황제들과 연결시킴으로써 중세 기독교의 영광과 욕됨을 점철시킨 핵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에게 ‘서방의 창건자’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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