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2) / 칼뱅의 종교개혁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0-11-30 10:22본문
1. 칼뱅의 생애
1) 출생과 성장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프랑스 느와용에서 태어나 파리의 마르슈 학교를 다녔다. 1523년 그는 파리 대학교의 몽테귀 칼리지에서 수학했으며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와 라블레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마찰을 빚어 성직 장학금이 취소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의 권유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 1535년 올리베땅에 의해 번역된 불어 성서의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은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그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으나 로마가톨릭과의 마찰로 칼뱅은 프랑스를 떠나게 되었다.
2)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 체류 시절(1536-1542년)
칼뱅은 제네바에서 첫 번째 기간(1536-1538년)을 머물게 된다. 1536년 당시 제네바는 약 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제네바에서 목회를 하던 파렐이 칼뱅에게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적 발전을 위해 일해 달라고 간청했기 때문이었다. 후에 그는 제네바 체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칼뱅은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판을 준비하기 위해 바젤에 남아 있기로 했다. 그러나 1538년 9월에 마르틴 부서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스트라스부르로 올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칼뱅은 마침내 부서의 요청에 따라 스트라스부르에 체류하게 된다(1538년-1542년). 그는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구성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곳에서 1539년에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라틴어판을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1536년 초판의 3배 분량이었다. 1540년 8월 6일에 칼뱅은 재세례파였던 쟝 스또르되르가 죽자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그들 사이에서 자끄라는 아들이 태어났으나 일찍 죽었으며, 부인 이델레뜨 역시 1549년에 세상을 떠났다.
3) 두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42-1564년)
칼뱅은 제네바 시의회가 자신의 제안대로 교회법 초안을 작성하겠다고 결정하자 최선을 다해 제네바를 위해 일하겠다고 약속해버렸다. 제네바 시의회가 교회법을 개정하고 시민법을 제정하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칼뱅은 자신의 개혁을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과 부딪혀야만 했다. 1546년 1월 26일 아모는 자신의 이혼 문제로 인해 칼뱅의 교리와 생활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미하엘 세르베투스는 잘못된 삼위일체를 주장함으로써 로마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교회 양측으로부터 이단자로 정죄되고 제네바에서 체포되어 1553년 화형에 처해졌다. 1555년 제네바시의 페렝 파가 패배함으로써 제네바 시와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목숨을 건 칼뱅의 기나긴 투쟁은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그는 1564년 2월 마지막 강의와 설교를 하고, 4월 시 장관들과 의원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1564년 5월 27일에 그는 5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나 그의 무덤은 알려져 있지 않다.
2. 칼뱅의 신학과 평가
1) 저서와 신학
칼뱅은 자신의 설교와 논문뿐만 아니라 주석들 안에서도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의 가장 간결한 진술은 그의 대작 「기독교 강요」에서 발견된다. 그는 이 책이 기독교 신학에 대한 자신의 간결한 요약으로 사용되기를 원했고, 자신의 주석들과 함께 읽혀지기를 바랐다. 「기독교 강요」의 여러 판들이 칼뱅의 영성을 확대시켰고, 성공적인 개정판들은 그의 신학이 젊어서부터 죽기까지 크게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로써 개신교 신학을 집대성했고, 개혁교회와 장로교를 통해 그의 신학은 많은 부분 계승되고 있다. 특히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에게 영향을 끼쳐 오늘날 장로교회 교리에 있어 그의 신학이 중요하다. 또한 영국 청교도들도 그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의 새 언약 아래 순종하는 것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칼뱅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여 신앙의 진정한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있으며, 교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선언한 종교 개혁자이기도 하다.
2) 칼뱅에 대한 평가
프랑스 북부에서 출생한 칼뱅은 당시 프랑스의 가톨릭교회의 박해를 피해 인접한 제네바로 이주하여 살다가 그곳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죽음을 맞이했다. 헤럴드 트리뷴에서는 “칼뱅은 제네바 학교 교육과정에서 검소하나 도덕을 강제하기 위해 신체적 억압을 동원한 강압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칼뱅은 장로교의 뿌리다. 그는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의 기초를 세웠다. 칼뱅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장했다. 그의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 비평가들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교회를 세운 탁월한 신학자와 폭군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