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6) / 중세 후반기 수도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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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0-05-25 09:32본문
영국 잉글랜드로 유입된 베네딕트 수도원 운동은 독일 선교사 보니페이스에 의해 게르만 민족에게 전파되었다. 그런데 서방 수도원은 점차 사회로 흡수되어 세상과 격리된 장소가 아니라 단지 수도사들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장소가 되었다. 8세기 무렵 귀족 자녀들이 수도원에 많이 들어오게 되면서 수도원에서는 노동보다 예배와 문화활동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1. 다양한 수도원의 형성
1) 클루니 수도원(Order of Cluny)
클루니 수도원은 910년 지금의 프랑스 부르군디에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교황권의 실추와 교회의 타락을 극복하기 위해 성직매매 반대와 성직자 독신을 강조하였으며, 10-11세기에 수도원 개혁의 중심이 되었다. 학문보다는 경건과 예배, 특히 매일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찬송과 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수도사들은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았다. 11세기에는 1000개 이상으로 수도원이 확대되었다.
2) 시토 수도회(Cistercian order)
이 수도회는 1098년 프랑스 시토에서 베네딕트 수도원의 원리를 재생하고자 새롭게 설립되었다. 수도사들은 고립된 지역에 수도원을 세웠고 흰 복장을 하고 침묵생활에 엄격했으며, 식사를 간소화하고 청빈생활을 했다. 반면에 수도자들은 육체노동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영농에 기여하여 중세 농업발전에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토지개간과 영국의 목양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 수도원은 클레르보의 성 버나드(St. Bernard)를 배출하여 더 유명해졌다.
3) 수도원의 쇠퇴
1200년 무렵 서방의 수도원은 이미 인기의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수도사들이 줄어들고, 수도생활의 표준이 낮아졌다. 수도원은 여러 차례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사회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이전 시대의 존경심을 모두 상실하지는 않았다.
2. 탁발 수도원 운동
1) 탁발 수도원(Order of Friars)의 형성
12세기부터 도시가 발달하자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그 중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단적인 종교형태가 나타났다. 탁발 수도사들은 때로 ‘거지 수도사’들로 불린다. 그들은 매우 금욕적이었고, 성읍과 도시에서 집중적으로 전도했다. 그들은 야외에서 설교하고, 갓 시작한 대학들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표적으로는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도미니크 수도원 등이 있다.
2) 프란체스코 수도회(Franciscan Order)
프란체스코는 1182년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청년 시절을 사치와 환락으로 보냈다. 그에게 회심의 기회가 두 번 찾아왔다. 한번은 그가 낡고 부서진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는데, 그때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리고 다른 한번은 한 작은 교회에서 마태복음 10장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구걸하면서 설교하고 다니는 유랑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208년 청빈과 노동, 이웃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하였다. 그것의 정식 명칭은 ‘작은 형제들의 수도회’였다. 이후 그 수도회는 1223년 교황의 정식 인가를 받아 발전하였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은 사도의 삶을 좇아 자신의 생활과 소유를 포기하고 오로지 복음 전파에 몰두하였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중시하여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과 구빈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들은 종교적 구원은 학문적 예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 의해 이룩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그들은 고통스러운 예수의 삶을 모범으로 삼아 일련의 고행의식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신학적으로는 의지를 강조하는 주의주의(voluntarism)와 신비주의 전통이 강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14세기에 수만 명의 신자를 확보할 만큼 발전하였으나, 이후 3개의 종파로 분열되었다.
3) 도미니크 수도회(Dominican Order)
이 수도회는 스페인 태생 도미니크 드 구즈만(Dominic de Guzman)에 의해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설교와 영혼구원, 학문발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는 13세기 초 프랑스 남부지역을 여행하던 중에 그곳에 확산된 이단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후 이단을 척결하는 일에 종사하며 수도회의 기반을 다졌다. 도미니칸 수도사들은 흰 옷과 검은 외투를 입었으므로 검은 탁발 수도사들로 불렸다. 그들은 청빈과 교육, 영혼구원, 복음전도 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말씀을 통해 이단을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종교재판소를 통해 더욱 강력하게 이단을 척결하였다. 중세 말 이단재판과 마녀 사냥을 담당한 심문관들은 대부분 도미니크 수도사들이어서 어두운 역사에 많이 연루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학문을 중시하여 중세의 신학과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들은 이성의 역할을 중시하는 주지주의(Intellectualism)적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의 거장들을 배출했다. 이처럼 탁발 수도사들은 사회적 목회적 교육적 선교적 활동에서 많은 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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