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6) / 18세기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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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1-07-28 10:50본문
종교개혁 후 정통주의 신학이 형성되면서 점차 교회가 이론적 영역에 갇히는 경향이 생겼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객관보다 주관, 이성보다 영성을 강조하는 신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경건주의 운동이라고 한다.
1. 정통주의
종교개혁 이후 1559년부터 1662년까지를 “정통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는 종교 개혁으로 발생한 신학의 주제들을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교리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정통주의는 크게 루터파정통주의와 개혁파정통주의로 구분된다. 루터의 제자 멜랑히톤과 마틴 켐니츠를 통해 형성된 루터파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의 축자영감을 정립하여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개혁파정통주의는 데오도르 베자와 윌리암 퍼킨스에 체계화되었는데, 교회의 신앙고백적 전통과 칼뱅의 신학적 유산을 발전시켜나갔다. 그들의 성경의 해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석한다는 원칙에 서 있었으나 관용이 아쉽기도 하였다. 특히 성만찬 문제와 예정설과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차로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안주의가 나눠졌다. 이러한 정통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합리주의와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2. 독일 경건주의 운동
1) 루터파 경건주의
17세기 말경 독일 루터파 교회의 정통주의적 경직화 경향에 반대하여 슈페너와 프랑케 등에 의해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루터교내의 경건주의는 17세기에 널리 읽혔던 신비주의적 신앙서적과 청교도의 문서들에 영향을 받았다. 루터파의 경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정통주의로 말미암아 중단된 종교개혁을 다시 계속한다는 의미에서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불렀다.
2) 경건주의의 신학적 입장
독일의 경건주의는 정통주의에서 강조하는 지적인 성향에 반하여 루터가 말하는 “개인적인 신앙경험”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완전을 향하는 초대교회의 생동성과 사랑과 능력을 강조하였으며 신비주의적인 영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루터 교회 내에서 분리주의 자들이라는 강한 저항을 받기도 했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의 경건의 실천함으로써 춤추는 것과 카드놀이, 극장출입, 세속문화를 거부하고 종말론적인 대망을 하며 살았다.
3. 진젠도르프와 모라비안 경건주의
1) 진젠도르프(Zinzendorf 1700-1760)의 헌신
니콜라우스 폰 진젠도르프 백작은 1700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예수님과 깊은 만남을 가졌다. 엄격한 경건주의 학교를 다녔으며,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그가 독일 뒤셀도르프의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이 사람을 보라’ 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그 그림 밑에는 ‘나는 너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라고 쓰여 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했지만 당신을 위해 어떤 것이라도 행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당신이 이끄시는 어떤 것이라도 행하겠습니다.”
2) 모라비안과의 만남
1722년 크리스천 다비드라 불리는 모라비안이 헤른후트(Herrnhut, 주의 보호)라는 공동체를 진젠도르프의 영지에서 설립하게 되었다. 진젠도르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재능과 재산을 쓰셔서 이 유서 깊은 교회를 재조직하고, 이를 통해 더욱 큰 역사를 이루고자 하심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1725년 90명, 1726년 후반에는 300명 정도가 되었다. 1727년부터 진젠도르프는 헤른후트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10년 후 그는 정식적인 목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
4. 진젠도르프의 경건 사역
1) 보헤미아 형제단
진젠도르프는 1734년 루터교 목사가 됨으로써 자신을 종파주의자로 보는 사람들과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충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유화시키려고 노력했으나, 2년 뒤 자신의 영지에서 추방당했다. 유배생활 동안 그는 모라비아교도들의 해외선교 사업을 정식으로 대표할 수 있도록 ‘보헤미아 형제단’의 감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청년 남녀들을 가정으로부터 분리시켜 엄격한 감독하에 신앙 훈련을 시키면서 “공동체가 없이는 기독교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1747년 작센 당국자들은 진젠도르프의 추방령을 취소했고, 2년 뒤에는 ‘보헤미아 형제단’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2) 개신교 선교사 파송
진젠도르프는 덴마크 왕 크리스찬 6세의 대관식 참여를 계기로 해외선교에 강한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그후 2명의 모라비안 교도를 버진 제도에 파송하였으며, 이때부터 소극적인 경건 생활에서 적극적인 세계 선교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모든 교인들이 선교열정에 가득했으며, 소렌슨이라는 사람은 선교지에 갈 준비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물론이지요, 내일이라도 구두 한 켤레만 준비된다면...”이라고 대답했다. 특히 모라비안 교도들이 존 웨슬리에게 신앙적 감화를 준 일화는 유명하다. 모라비안 교회는 1760년 그린랜드의 13개 지역과 중부와 북부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에 선교사를 파송했으며, 1930년까지 세계 14개 나라에 3,000여 명의 선교사들을 파송되었다.
진젠도르프는 말한다. “교회의 기초는 신조가 아니라 경건에 있다.” “나에게는 단 한 가지 열망밖에 없다. 그것은 예수님, 오직 그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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