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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워스에서 옥스퍼드까지 (1703-1735)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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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워스에서 옥스퍼드까지 (1703-1735)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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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워스에서 옥스퍼드까지 (1703-1735)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4-09-10 14:15

본문


1. 영원한 고향 엡워스에서의 어린시절(1703-1711)


1) 신앙과 경건의 명문가에서 출생한 존 웨슬리

 

존 웨슬리는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세상적인 의미의 명문가가 아니라 신앙과 경건에서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명문가였다. 친가 선조들은 중세기부터 대대손손 성직자가 많았고 학자와 의사 시문학가가 많았다. 고조 할아버지는 영국 남부 데븐주의 영웅적인 기사였다.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며 학식과 시문학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고루 소유한 유명한 기사였다. 존 웨슬리의 외가도 영국 교회사에서 빛나는 명문가였다. 

 

외할아버지 사무엘 아네슬리 박사(1620-1696)는 옥스퍼드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민법학박사가 되었다. 그는 청교도의 대부라 불릴 정도로 당대 청교도 운동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였다. 세속적인 권력에서는 가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과 고독과 박해와 고난 속에서 오히려 경건과 학문과 성직을 온전히 지켰으며, 후손에게 거룩한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인류의 사도인 존 웨슬리의 탄생을 예비하셨던 것이다.

 

존 웨슬리는 1703년 6월 17일 잉글랜드 북부의 링컨주(Linconlnshire)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인 엡워스(Epworth)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와 어머니 수산나 사이에서 19자녀 중 1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709년에 일어난 목사관 화재 사건 때 당시 6세였던 존 웨슬리가 불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출되었기 때문에 그의 생애와 메도디스트 역사에 유명한 이야기로 기억되었다. 

 

그의 부모는 이 화재 사건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생각하였으며, 어머니 수산나는 화염에 싸인 목사관 지붕이 무너지기 직전에 아이가 살아난 데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다고 믿고, 다른 아이들보다 더욱 특별한 관심과 사명감을 갖고 키우기로 결심하였다.

 

2) 무엇에나 진지하고 총명한 아이 존 웨슬리

 

존 웨슬리의 후계자요 전기 작가인 아담 클라크(A.Clarke)에 의하면 존 웨슬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모든 일에 진지하고 학구적인 기질을 가졌으며, 모든 일을 이성과 양심에 꼭 맞게 행하려고 노력하였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도덕에 맞는 것인지 어긋난 것인지 분명히 확인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어떤 일을 하라고 요청받았을 때, 예를 들어 식사시간 외에 빵이나 과일을 먹으라는 제안을 받으면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만 말하고 먹을 것인지 안먹을 것인지를 결정하고 난 후 대답하는 습관을 가졌다. 어려서부터 합리적이고 진지하게 양심과 신앙에 따라서 행동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8세부터 성찬상(성만찬)에 나갔던 존 웨슬리

 

어린 존 웨슬리는 명상적이고 이성적인 아이인 동시에 영적이고 신비적인 경험을 하면서 자라났다. 존이 일찍부터 어머니에게 엄격한 신앙훈련을 받았지만 아버지의 깊은 배려에 의해서 깊은 신앙 체험을 하였다는 사실도 아주 중요하다. 존 웨슬리가 8세부터 일생동안 규칙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성찬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주 드물고도 놀라운 일이다. 존 웨슬리는 어려서부터 주의 성찬상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이루는 기도를 하며 자랐다. 존 웨슬리는 자신이 10세까지는 결코 죄를 짓지 않았으며, 갓난아이로 세례식을 통해서 받은 “성령의 씻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4) 규칙에 따르는 생활로 훈련받은 존 웨슬리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고, 어머니 수산나는 당대에 영국 청교도 대부로 존경받고 있던 사무엘 아네슬리 박사의 25번째 막내딸이었다. 존 웨슬리는 아버지로부터 영국교회 경건주의 신앙과 어머니로부터 청교도 경건주의 신앙을 몸에 배도록 배웠다. 장남 사무엘은 영국교회의 성직자로서 훌륭한 교육가였으며 15번째 아들 존은 메도디즘의 창시자로 위대한 신학자요 전도자였다. 18번째 아들 찰스 역시 메도디즘의 창시자로 교회사에 가장 빛나는 위대한 찬송작가였다. 

 

존 웨슬리는 어머니 수산나의 규칙에 따라 생활하는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잠자리에 드는 것 일어나는 것, 식사, 기도, 독서, 공부, 노는 것, 일하기 등 하루의 모든 생활을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하였으며, 모든 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었다. 성수주일, 부모에게 순종하기, 거짓말 하지 않기,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brother과 sister를 붙이기, 남의 소유권 침해하지 않기, 시간 약속 지키기, 회초리를 두려워하기, 잘못하여 매 맞고 울 때는 소리 내지 않고 울기, 아플 때는 무슨 약이든 잘 먹기, 집안에서 큰소리 내지 않기, 경박한 말이나 장난하지 않기, 남에게 무엇을 요구할 때 겸양의 예의를 지키기, 간식 안 먹기, 식사 시간에 제멋대로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을 요구하지 않기, 가족 기도회에 참석하기, 음식을 버리거나 남기지 않기, 침대보와 이부자리 교체하기, 옷 입고 벗기는 스스로 하기 등이다. 이러한 규칙을 잘 지킬 때는 칭찬과 상이 주어졌으며 잘 지키지 않을 때는 벌을 받았다. 


2. 세상에 나온 어린 성자, 차터하우스 학교에서(1711-1720)


존 웨슬리는 10세 반이 되었을 때 어머니 수산나의 개인지도 학습을 수료하였다. 존 웨슬리는 초등학교 교육을 어머니의 가정학습으로 마친 것이다. 당시에는 아이들의 초등학교 과정을 집에서 부모가 직접 가르치거나, 아니면 개인교사를 두어 마치게 하는 등 주로 가정학교(Home school)로 마쳤다. 1714년 1월 28일 존 웨슬리는 런던에 있는 명문 사립기숙학교(boarding school)인 차터하우스 학교(Charterhous School)에 버킹검 공작의 추천을 받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차터하우스 학교는 1611년 카투시안 수도회에 의하여 세워졌으며, 설립된 이래 현재까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명문 사립학교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카투시안 수도회는 1084년 프랑스의 신비주의 성자 브르노(St.Brund 925-965)가 세운 엄격한 관상수도회로서 세속에 대한 완전한 죽음과 포기를 추구하는 수도 규칙을 갖고 있었다. 

차터하우스에서 존 웨슬리는 카투시안의 전통을 따라 엄격한 교육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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