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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도디즘 창시자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1662-1735)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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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도디즘 창시자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1662-1735)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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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도디즘 창시자의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1662-1735)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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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4-05-16 09:48

본문


사무엘은 1662년 영국 남부 도체스터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도체스터 트리니티 교구 목사요 도체스터 지방의 대부(大父)로 알려진 존 화이트 목사의 딸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부친 존 웨슬리는 1662년 비국교도 성직자 2,000명이 대축출될 때 함께 축출되어 담임하던 화이트 처치 교구에서 쫓겨났다. 

 

이때부터 사무엘의 가족은 살 집도 없이 방랑 생활을 하면서 온갖 종류의 박해와 시련, 지독한 가난과 고독을 견디면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그가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홀로 네 자녀를 길렀다. 그의 어머니는 비국교도들의 도움을 조금 받았지만 역시 극심한 가난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남은 사명은 네 자녀에게 정통기독교 신앙과 교육을 주는 것이라고 믿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다.  

 

사무엘은 16세까지 도체스터의 비국교도 학교에 다녔으며, 18세까지는 런던의 에드워드빌 비국교도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아버지의 스승인 존 오웬의 추천을 받아 런던의 명문 비국교도 학교인 스토크 뉴잉톤 아카데미에 갈 수 있었다. 두 학교에서 그는 당시 가장 뛰어난 비국교도 스승들에게서 배웠으며 탁월한 학문적 소질을 보였다. 사무엘은 런던에서 학교를 다닐 때 존 번연의 설교를 몇 번 듣고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추억하였다. 


걸어서 옥스퍼드까지 

 

사무엘은 21세 되던 해에 자신의 신앙과 정치적인 입장에서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선조들의 오랫동안 충실히 지켜온 비국교도 신앙을 떠나서 국교도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급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들 존 웨슬리에 의하면 사무엘은 머튼 아카데미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비국교도에 대한 국교회의 반대이론을 연구하여 잘못을 지적하려는 연구과제를 받았다. 

 

그는 이 숙제를 하다가 국교회의 비국교도에 대한 반론이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비국교도를 떠나 국교도가 되기로 결정하고, 더 이상 비국교도학교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뒤에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몇 시간을 걸어서 옥스퍼드대학으로 갔다. 비국교도는 옥스퍼드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이제 사무엘은 국교도로서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무엘은 옥스퍼드에서 5년간 공부하면서 그는 확고한 국교도가 되었으며 특별히 고교회(High church : 영국왕은 영국이라는 교회, 즉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며 주교를 통한 성직자 임명, 로마 가톨릭적 전례의 형식 등이 유지된다. 이를 고교회파(High Church)라고 한다) 경건주의와 영국왕과 국교회에 충성하는 신앙으로 성직의 길을 준비하였다. 그는 1688년에 집사,  그 다음 해에 장로의 성직을 임명받았다.


감독으로 추천되었으나 일평생 시골 목사로 살았던 사무엘 웨슬리 

 

사무엘은 1688년 명망 높은 청교도 지도자인 아네슬리 박사의 25 자녀 중 에 막내딸 수산나와 결혼하였다. 수산나는 목사의 아내로서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는 최고의 배필이었다. 그녀는 신앙 좋은 집안의 출신으로 경건과 성품이 탁월한 데다 외모 또한 자연미와 경건미가 돋보이는 매우 아름다운 처녀였다.  

 

사무엘은 런던의 올더스케이트에 있는 보톨프 교회에서 부목사로 첫 목회를 시작하였으나 곧 해군 군목으로 나갔다. 그는 바다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갓 결혼한 아내와 첫아이 사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1년 만에 군목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런던 근처에서 부목사로 일하였다. 그후 사무엘은 1년 만에 런던의 부목사직을 그만두고 잉글랜드의 북쪽 링컨주의 사우스 옴스비(south omsby) 교구회에 담임 사제로 부임하였다. 

 

사무엘은 1694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M.A)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아이랜드에 감독으로 추천되기도 하였으나 당시 32세의 너무 젊고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되었고 사무엘 자신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더 크고 넓은 교구 목회자가 될만한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정치적인 수단이나 방법을 써서 도시교회, 더 좋은 교구로 자리를 옮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이 주교직을 받았다면 그는 메도디즘 창시자의 아버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웨슬리언.jpg

나는 아직도 부자입니다. 1709년 목사관 화재 사건 

 

웨슬리 가족이 거주하던 동안에 엡워스 목사관에는 세 번의 화재가 발생하였다. 이미 1702년 화재로 목사관은 3분의 2가 파괴되었는데 1704년 화재로 모두 타버렸다. 목사관은 재건축되었으나 1709년 세 번째 화재가 발생했다. 이것은 메도디스트 역사 중에 가장 의미 있게 기억하는 사건이 되었다. 그 화재는 1709년 2월 9일 수요일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일어났다. 모든 식구들이 잠든 사이에 집은 온통 불길에 휩싸였고 불붙은 천장이 여덟째 아이 헤티의 침대에 떨어졌다. 헤티는 놀라서 “불이야” 하고 소리를 쳤으며 사무엘도 동시에  거리에서 “불이야”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사무엘은 온 식구들을 깨워 속히 불을 피해 나가라고 소리쳤다. 이때 집안에 약간의 금과 은 그리고 20파운드 돈이 있었는데 아내 수산나가 그것들을 건지려고 머뭇거리자 사무엘은 속히 나가라고 소리치며 그녀를 밖으로 밀어냈다. 6살된 존은 공포에 질린 소리로 울었다. 

 

존이 구출된 후에  아내 수산나는 사무엘에게 “당신의 책은 얼마나 구하셨나요?”라고 물었다. 사무엘은 “다 잃어버렸고 모든 소유물이 불타 버렸지만 당신과 우리 가족이 모두 살았고 생명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오직 감사할 따름이요.”라고 대답했다. 

 

이 때 동네에서 모여든 교구민들을 향하여 “자 우리 무릎 꿇고 기도합시다. 우리 모두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내게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을 열아홉이나 주셨습니다. 집은 가버리라고 합시다. 나는 아직도 부자입니다.”(Let the house go, Im rich enough). 이 얼마나 감동적인 신앙의 고백이고 아름다운 간증인가? 이때 수산나는 이미 열여덟명 아이를 낳았고 열아홉째 막내를 임신 중이었다.

 

존 웨슬리는 1737년에 자신을 ‘불속에서 꺼낸 막대기’(a brand pluked out buming)라고 말하면서 어머니의 말씀대로 자신의 기적적인 구출이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다는 믿음을 고백하였다. 수산나와 존 웨슬리는 그 화재사건과 기적적인 구출이 존 웨슬리에 대한 하나님의 크고 거룩한 뜻이라고 믿었으며 존 웨슬리는 이러한 섭리를 깨달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소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사무엘은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으나 수입 중에서 십일조를 반드시 바쳤으며 국가에 세금도 정확하게 납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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