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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조상 한 과부의 이야기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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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조상 한 과부의 이야기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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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의 조상 한 과부의 이야기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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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4-04-24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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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리.jpg

웨슬리가의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영국감리교회의 역사학자들은 영국인들 중에 Wesley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의 족보를 추적하여 웨슬리가의 뿌리를 찾아냈다.

 

존 웨슬리의 후계자였던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웨슬리의 선조들의 기원에 관하여 오랜 세월 추적하였다. 웨슬리 선조들이 스페인에 살고 있던 아랍 민족 출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는 선조들이 스페인으로부터 온 켈트족 출신일지 모른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선조들은 본래 5세기 초부터 영국 땅에 침입하여 정착한 색슨족(saxons)이라는 확신을 가졌으며 이후 웨슬리가의 기원을 연구하던 모든 역사가들도 이러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웨슬리가가 주로 영국 남부와 서부 지방에 살고 살았다는 증거를 얻고 그 지방에 웨슬리가의 자손들 가운데 전해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찾아냈고 이 이야기가 신빙성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1세기 영국은 지금의 프랑스 민족의 조상인 노르만족(Normans)의 침략을 받아 전쟁이 없는 날이 없었으며 결국은 노르만의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에 의하여 잉글랜드 전체가 정복당하고 노르만 제국의 통치를 받는 소위 노르만 브리튼(Norman Britain, 1066-1109) 시대를 맞이하였다. 특별히 영국의 남부와 서부 지방은 노르만 군대의 잦은 침략을 받아 가장 비참한 전투가 오랫동안 벌어졌던 곳이다. 

 

이 당시 남서부 지방에서는 16세 이상의 남자는 법에 의하여 무조건 전쟁에 징집되었다. 그래서 영국 남서부 지방에는 지금까지 노르만족의 무서운 침략과 갖가지 전쟁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원래 웨슬리의 선조 고향은 영국 남부의 서섹스(Sussex)주였는데 1066년에 노르만디 군대가 그 지방을 처음으로 침략해왔고, 유명한 헤이스팅스 전투(The Battle of Hastings)에서 그 지방의 16세 이상 남자들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웨슬리가의 한 과부가 자기의 아들딸들을 데리고 서머세트(Somersethire)주 지방의 작은마을로 도망하여 숨어 지내며 자녀들을 키웠던 것이다. 


웨슬리 과부가 도피하여 숨어 살았던 그 마을의 처음 이름이 ‘웰스웨’(Welswe)였으며, 노르만 정복 후에는 ‘웰슬레’(Welslegh) 또는 ‘웰레슬레이’(Wellesleigh)라고 불렀는데, 바로 이 마을의 이름이 웨슬리가 이름의 기원이 된 것이다. 

 

웨슬리가의 이름은 1539년부터는 ‘웰레슬리’(Wellesley) 또는 ‘웰슬리’라고 부르다가 마침내 오늘의 이름 웨슬리(Wesley)라고 부르게 되었다. 

 

웨슬리 과부는 용감한 여인이었다. 다른 과부들은 웨슬리 과부처럼 도망하지 않고 그 지방을 정복한 노르만의 하급 귀족들과 자발적으로 또는 대부분 강제로 결혼하였다. 

 

그러나 웨슬리 과부는 그곳을 탈출하여 정절을 지키면서 하나님이 그녀의 자손들을 통하여 이루실 더욱 고상한 역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부는 용기 있는 여인이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깊은 경건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그녀는 자녀들을 철저한 기독교 신앙으로 양육하였고 그 자녀들은 상당히 오랫동안 그 마을에 살면서 번성하였다.

 

이들 중에 한 지파가 아일랜드로 이주하여 큰 가문을 형성하였으며 잉글랜드의 친척들과 상호 결혼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웨슬리의 고조할머니 엘리자베스 웨스틀레이는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존 웨슬리에게는 아일랜드 사람의 혈통이 섞여 있다. 

 

그 용감한 과부의 자손들은 약 600년 동안 주로 남부 서머세트(Somersethire)주와 도세트(D0rsetshire)주의 여러 마을에 살면서 번성하였다. 


중세 기사도의 가문 (1109- 1595)


영국교회의 역사적인 기록이나 웨슬리가의 기록에 의하면 웨슬리가에서는 대대손손 성직자, 학자, 의사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특별히 중세기를 지나면서 훌륭한 기사(騎士: chivalry)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기 수백년 동안 웨슬리 가문은 기사도의 가문으로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중세기 영국에서 기사 계급은 사회적으로 상당히 높은 신분과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사도는 11세기부터 봉건사회의 제도로서 영주의 개인 영토와 저택 안에서 형성되었다. 기사는 왕과 제후들을 호위하고 지방의 영주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부여 받은 준 귀족층에 속하였다.

 

기사는 언제나 종교적인 자애심과 도덕적인 덕망을 가지고 백성을 대해야 했다. 그래서 기사 후보생들은 목욕 의식을 통하여 순결을 서약하고 목욕하고 물에서 나올 때는 순결의 상징으로 흰 가운을 입고, 그 위에 붉은 겉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그가 왕족과 귀족과 나라를 위하여 흘려야 하는 피와 희생을 상징하였다. 

 

기사는 신성한 의무를 성실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배우고 훈련해야 했다. 이와 같은 중세기 영국 기사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웨슬리 선조들의 삶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다. 웨슬리의 고조할아버지 허버트 웨스틀레이(Sir Herbert Wesltleigh)는 당 시대의 영웅적인 기사였다. 그는 대단히 깊은 신앙과 기독교 학문으로 가득찬 기사로서 특별히 시(詩) 문학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허버트경의 부인 엘리자베스 웨스틀레이도 역시 아일랜드의 유명한 기사의 딸이었다. 허버트경은 아들 셋을 낳았는데 그 중에 셋째 아들이 존 웨슬리의 증조할아버지 바톨로매 웨슬리다. 웨슬리의 선조들은 수백년 동안 학식, 경건, 도덕, 시 문학, 음악 그리고 충성심과 기사도 정신을 탁월하게 갖추고 국가와 사회를 지켜온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수백년 영국인의 종교와 정신세계, 그리고 영국 사회의 도덕적 문화를 형성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바톨로뮤(Bartholmew) 웨슬리 - 메도디즘의 창시자 (1595-1680)


웨슬리 역사가들은 주로 영국 남서부의 서머세트 지방과 도세트 지방의 향토사와 오래된 교회 역사 그리고 웨슬리 가문에 전래되는 증언을 통해 웨슬리의 족보를 추적하였다. 이들이 추적한 웨슬리 족보에 의하면 이름과 존재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랜 웨슬리 선조는 16세기경에 살았던 웨슬리의 조부모 허버트 웨스틀레이경과 엘리자베스 웨스틀레이다. 허버트 웨스틀레이는 아들 셋을 낳았는데 둘은 젊어서 죽고 막내 아들 바톨로뮤는 국교회 성직자인 동시에 의사가 되었고 약 85세까지 장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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