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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신앙의 뿌리를 찾아서(1) 박귀임 전도사 > 최상근 교수의 청주, 충북지역 순복음교회 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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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신앙의 뿌리를 찾아서(1) 박귀임 전도사 > 최상근 교수의 청주, 충북지역 순복음교회 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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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신앙의 뿌리를 찾아서(1) 박귀임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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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굼 작성일18-11-14 11:14

본문

Ⅰ. 들어가는 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교단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1953년 4월 8일 남부교회에서 창립되어 현재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교단이 되었다. 성령의 뜨거운 불길이 타오름으로 교회가 부흥하고 세계선교에 가장 앞장서게 되었고, 현재도 수많은 교회, 교역자들이 오순절신앙을 열심히 전하고 있다. 한국 오순절교회가 이렇게 엄청난 부흥을 가져온 것은 초기 여성 사역자들의 역할이 크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에 오순절신앙을 처음으로 전래한 럼시(Mary C, Rumsey), 성령운동과 전도부인의 맥을 이은 최자실 목사, 충북 오순절 신앙의 어머니 하나님의 사람 정면. 충북에서 기도원운동을 일으킨 김상애 목사, 전남지역 오순절신앙을 전해 부흥시킨 김유정 목사, 전남 지역에 오순절신앙과 기독교하나님의 성회 초기 역사를 만든 박귀임 전도사. 이러한 위대한 여성 사역자가 있었기에 오순절교회는 현재의 부흥을 가져왔다고 본다. 이 본 연구는 전남 지역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회 부흥 발전을 위해 힘쓴 박귀임 전도사를 연구하는 데 목적을 둔다.


Ⅱ. 박귀임 전도사의 생애와 목회
20세기 초는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기도 하였지만, 종교, 정치, 사회적으로 도전을 맞게 된 시기다. 주권의 상실과 열악한 경제 상황으로 20세기 초에 이르러 사람들의 빈곤은 극심했으며 모든 여건이 비참하였다. 이런 비운의 시대에 박귀임이 태어났다.


박귀임은 1912년 1월 9일 전남 목포에서 9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는 목포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다가 26세에 상업을 종사하던 문성원 씨와 1938년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어릴 때의 신앙이 생각나서 충남 논산감리교회를 출석하였다. 신앙생활을 하던 중 논산감리교회에 당시 유명했던 부흥사 이성봉 목사의 부흥집회에 참석하게 되는데 이때 말씀을 듣는 중에 은혜를 체험하게 되어서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다. 이성봉 목사를 통해 은혜를 받아 한국교회에 크게 기여한 여성 사역자는 문준경 전도사, 최자실 목사, 박귀임 전도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편 곽봉조 목사가 개척한 한인교회에 박자신이라는 부인이 있었다. 박자신은 자신의 신앙을 그의 시어머니 이복덕에게 전하였다. 이복덕은 그 후 예수를 믿어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감화를 받았다. 많은 사람들 중에 표씨 부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은혜를 받아 자신의 집에 예배처소를 준비하여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 가정예배에 1947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있던 박귀임이 우연한 기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표씨 부인의 설교를 듣고 오순절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때가 1947년도이다. 그 이후 박귀임은 예배를 열심히 참석해서 말씀듣기와 기도에 전념하는 중에 1947년 6월에 뜨거운 성령세례를 체험하게 되었다. 성령 충만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박귀임은 전라남도 순천 철도국에 근무하는 남동생 집에 가정교회를 세우고 성령운동을 크게 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출석하던 순천중앙장로교회에서 성령운동을 추종하던 박귀임과 성도들은 출교를 당하게 된다. 출교 당한 박귀임과 성도들은 남내동에 허름한 가옥을 빌려 집회소를 정하고 1948년 3월에 ‘대한기독교 순천 오순절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설립된 순천오순절교회는 전라도에 세워진 최초의 오순절교회가 된다.


오순절성령운동을 적극적으로 전하는 순천오순절교회는 크게 부흥되었다. 날마다 뜨거운 기도와 말씀, 전도를 통해 인근지역까지 소문이 나서 많은 성도들이 구름처럼 몰려 왔다. 교회가 크게 부흥하자 박귀임 전도사가 감당하기 어려워져 새로운 교역자가 필요하였다. 이 때 대전장로교회에서 장로로 있던 박헌근 장로를 청빙해서 초대 교역자로 세웠다. 박헌근 장로는 부임 후 뜨겁게 말씀을 전했고, 박귀임 전도사는 전도와 심방으로 박헌근 장로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순천오순절교회는 300명이 넘는 교회로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 박헌근 장로의 순교였다. 순천오순절교회는 크게 부흥하면서 박귀임 전도사, 허홍, 박성산, 김성환, 윤성덕, 박헌근 장로가 1950년 4월 9일 제1회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를 개최한다. 성회 때 말씀을 전했던 박헌근 장로를 전쟁 때에 잃은 것이다. 박헌근 장로는 공산군이 점령한 순천지역에 있는 성도 집을 심방하면서 방언, 신유 등 오순절역사를 뜨겁게 일으켰다. 그러나 심방하던 중에 공산당원에 잡혀 무참하게 총기로 난사 당해 순교하였다. 한국에 오순절교회와 신앙이 전래된 지 22년이 되는 1950년 9월 말, 한국오순절교회는 최초의 순교자를 낸 것이다.


6.25전쟁을 통한 한국오순절교회의 참상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초의 한국오순절교회인 서빙고교회는 물론, 해방 전에 설립하였던 예배처소마저 하나도 남김 없이 파괴되었다. 1952년 각고의 노력과 눈물로 재건된 교회는 8개 교회뿐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박귀임 전도사는 제2회 1952년 5월 4일, 제3회 1953년 4월 8일, 제4회 1953년 10월 11일 광주대회에 참여하여 교단 발전에 헌신한다. 특히 제3회 대회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조직의 기반이 되는 대회였다. 박귀임은 11명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석하여 초기 교단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이후 박귀임 전도사는 전남, 호남지역에 교회를 세우는데 전력을 다한다. 1952년 10월 5일 광주오순절교회(광주순복음교회), 1952년 11월 24일 구례순복음교회, 1962년 8월 2일 순복음광주중앙교회를 개척하여 순천과 전남지역에 오순절신앙을 널리 전하였다. 박귀임 전도사를 통해 은혜 받은 많은 교역자와 교회는 지금도 전남, 호남지역에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다.


Ⅲ. 나아가는 말
박귀임 전도사는 순천과 호남지역에 오순절신앙을 가장 먼저 전한 여성사역자이다. 그가 오순절신앙을 뜨겁게 전했던 시기는 해방 이후 고난의 시기였다. 그러나 박귀임 전도사는 오직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했다. 교회에서 출교 당하는 아픔을 당하면서도 오직 교회와 성도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박귀임 전도사가 교단과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크다고 본다. 호남지역의 오순절운동과 교단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그녀에 대한 평가와 연구가 부족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박귀임 전도사의 생애와 사역, 사상, 오순절성령운동, 설교, 실천신학 부분에서도 연구가 된다면 박귀임 전도사에 대한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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