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신랑, 순결한 신부” (계 19:1~10)
이성주 목사(용인지방회장, 순복음수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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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4-07-30 10:22본문
사람들은 신데렐라 이야기 같은 신분의 차이를 극복한 사랑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예전만 해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어느 정도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지나가고, 돈과 권력과 사회 및 문화에 기인하여 이루어진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고 세습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급과 신분의 차이가 있는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형편이 기우는 쪽이 무시를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도 생깁니다.
그런데 엄청난 신분의 차이가 있는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창조주인 예수님과 피조물인 우리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우리는 무능력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시고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우리는 죄와 허물이 많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되었다고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전능하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말해주고 있는 성경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시작하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대 주어가 예수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말씀을 읽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신랑 되신 전능하신 예수님은 피조물인 인간을 자기 신부로 삼기 위하여 어떤 일들을 하시는지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어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해야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간을 신부로 삼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능함을 다 포기하시고, 타락하여 흠이 많고 무능력한 우리를 신부 삼으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이 이 땅에 먼저 우리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하신 일을 천상에서는 다 보았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찬양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시고 맞이하는 신부를 위해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신부를 향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에 천국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찬양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여전히 싸워주시는 예수님을 보게 되니까 성도들은 환호하고 박수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두 번 결혼합니다. 이 땅에서의 결혼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에서의 결혼입니다. 천국에서의 혼인잔치를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진짜 결혼식입니다. 이 땅에서 결혼을 못했다 하더라도 진짜 결혼이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도와 결혼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장차 예수님이 택하신 성도와 결혼하실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고 아담과 하와의 결혼식에서 직접 주례를 해주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라. 부부가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라.”
결혼제도는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또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가르쳐 주십니다. 가족제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생존과 자손만을 위한 단순한 제도가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마음을 주셨는데 결혼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족제도를 가볍게 생각하고 파괴하는 행위는 창조 질서와 목적에 위배되는 행위입니다. 악한 영은 하나님이 주신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부부 관계를 깨트리려고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우리가 결혼할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인간이 이러한 지위가 되는 것이 몹시 못마땅하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지어진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실도 기분 나쁘고, 영으로 지음 받은 천사보다 흙으로 지어진 열등한 존재가 자신보다 높게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재를 영의 천사보다 높여주시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인간을 타락시켜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없도록 만들기 위해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타락한 존재인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구원해 주시고 신부 삼아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해서 예수님의 계획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늘 가변적인 우리의 계획과는 다르게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삼으실 때에, 우리에게 죄악과 허물이 있든, 사탄의 계획이든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으시고 우리를 회개케 하심으로 깨끗하게 만드셔서 혼인잔치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에 ‘예수님의 혼인잔치’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말합니다. 왜 ‘어린양의 혼인잔치’라고 말할까요? 예수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성도와 결혼하기 위해서 어떤 구원의 사역을 나타내셨는지에 대한 상징적인 단어가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라는 단어에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럽고 타락한 자신의 신부를 구원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스스로 죽어야 하는 우리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신부를 결혼식에 초대하기 위해서 신랑 되는 예수님이 어떤 사랑의 대가를 치르셨는지가 ‘어린양의 혼인잔치’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저주와 죽음을 넘어서고, 아무리 깊은 골짜기와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어도, 아무리 넓은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을 미리 보고 기뻐합니다. 지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왔다.”라고 말합니다. 신부는 준비되고 결혼식이 임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깊은지, 크고 넓은지를 신부들이 알게 됨으로써 신랑을 향해 소리높여 찬양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며,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감사하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신부를 괴롭히는 자들을 심판하고 계십니다. 그 어린양 예수님이 사랑하는 신부에게 자신의 피로 씻은 옷을 입혀주십니다. 신부로 적합하지 않은 성도를 예수님이 찾아가셔서 자신의 의의 옷을 입혀주시고 그 행실이 옳다고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밝고 깨끗한 신부가 된 것입니다.
천국에서 우리의 의로 옳다 인정받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의 의를 덧입어 옳다 여김을 받는 성도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 둘 다 주인공이지만 모든 결혼식에는 신부를 가장 돋보이게 합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신부가 가장 아름답고 돋보이도록 만들기를 원하셔서 자신의 의로 신부에게 세마포 옷을 입혀주시고 가장 돋보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 결혼식은 아무나 참석할 수 없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습니다. 이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9절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이하는 그 혼인잔치에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결혼인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모두가 초대받아 깨지지 않는 영원한 허니문으로 살 수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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