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ght_maket_banner.png
순복음홍성교회 라동옥 목사가 직접 농사지은 벌꿀판매
이태근 목사와 함께하는 아침묵상
본교단 업무협약 업체 / 기하성회원 특별우대
홍영건장로
하나로의료재단
종교인과세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2:1~13) > 설교

본문 바로가기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2:1~13) > 설교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행 2:1~13)

이상암 목사(부경지방회장, 순복음생명의말씀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24-07-08 14:30

본문

이상암 목사(설교).jpg

오순절 성령 강림과 같은 역사는 일찍이 없었다. 이 신비하고도 놀라운 사건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이다(사32:15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욜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에스겔서 36장에서 우리 속에 새 영을 부어주시는 이유는 우리 속에 굳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만나면 먼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원망, 불평하며 악한 생각을 말로 쏟아내는 이런 마음을 성경에서는 굳은 마음, 완고한 마음이라고 한다. 이 굳은 마음을 우리 힘으로는 제거하여 부드럽게 할 수 없다. 청년들은 수십, 수백 장의 이력서를 보내봐도 연락이 없어서 절망하고, 아빠 찬스, 엄마 찬스를 쓸 수 있는 청년들이 회사를 골라서 가는 이 불공정의 현실에 대부분의 청년들은 또 한 번 절망한다. 이 절망은 사회와 국가를 저주하게 만들고 자기 자신까지도 저주하게 만든다. 결국 모든 일을 냉소적인 태도와 이기적인 마음으로 바라보며 지극히 계산적이며, 이기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이 굳은 마음은 본인이 완고한 것도 있지만, 이 사회의 불의하고 불공정한 환경도 그 원인이 된다. 인간의 이 굳은 마음은 국가도, 사회도,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도, 아무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줄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깊이 깨닫게 된다. 

 

마21:9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온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온갖 질병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이시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환호하며 예수님을 찬양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굳은 마음이라는 증거는 요19:6에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찬양했던 그들이 돌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52:13-53:12에서 내가 보내는 메시아는 우리 죄에 대하여 고난받는 종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완악한 바리새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자가에 달리는 무기력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을 거스르는 이 굳은 마음은 결국 부패한 마음을 의미한다(렘17:9;막7:20-23). 

 

그런데 놀라운 것은 사32:15;겔36:26;요16:7에서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의 굳은 마음, 부패한 마음을 깨뜨리고 새롭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성령님만이 우리를 생명의 길, 평강의 길, 영생의 길, 복 된 길로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에 성령님이 오셔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행1:4-5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을 붙들고 기도했던 제자들의 앞에도 얼마나 끔찍한 환난과 핍박이 기다리고 있었겠는가.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이라고 준엄하게 책망했던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들이 앞으로 얼마나 심하게 제자들을 핍박할 것이 눈에 보이는데도 그들은 예전과 같이 도망가거나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성령 강림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다.     

 

오순절은 원래 구약에서 ‘칠칠절, 맥추절(보리를 처음 거두는 때), 초실절(첫 열매의 날)’로 불렀던 절기로서 유월절(자신들의 죄로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날을 기념하는 절기)의 둘째 날, 즉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날(=무교절)로부터 50일째 해당하므로 ‘오순절’이라 불렀다(헬. 펜테코스테). 2절의 ‘바람’(성령. 헬. 프뉴마. ‘바람, 호흡, 숨, 기운’)은 그 형체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잘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님의 강림을 확증시키기 위해 청각을 통해 체험하게 하신 것이다. 성령님의 강림은 또한 시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3절 “그들에게 보여”). 3절에서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며(출3:2,19:16-20), ‘심판’(신4:24;마3:12;계20:19), ‘연단’(사48:10;벧전1:6-7), ‘정결’(렘23:29;말3:2)을 의미하기도 한다. 4절(“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에서, ‘세례 주다’를 헬라어로 ‘밥티조’라고 하는데, 이것은 ‘물에 푹 잠그다’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성령 세례’(헬, 밥티즘. 행1:5)는 곧 물에 푹 잠기듯이 성령으로 완전히 지배당하는, 사로잡히는, 붙들리는 것을 뜻한다. 마침내 약속의 말씀이 청각으로, 시각으로 체험이 되는 놀라운 장면이 2-4절의 말씀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120명의 제자들은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 여기서 ‘다른’의 의미는 인간의 입술로 나오지만 자신의 감정이나 지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영적인 말’이라는 뜻이다. 성령님은 방언(일본어, 중국어 등의 외국어 방언과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의 두 종류)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것’(=영적인 비밀)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고전2:10,14).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성령님이 더 깊고, 더 높고, 더 충만한 차원의 기도로 들어가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방언은 성도들에게 축복이며(고전 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또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불신자들에게는 표적이 된다(6-8절,고전14:22). 

 

제자들은 오순절 이전만 해도 ‘제자의 삶’(=제자도)에 대해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성령 강림을 통해 그들은 주님의 말씀(=복음)을 깨닫게 되었고(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비로소 주님과 연합하게 되었다(갈 2:20).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갔다(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성령 강림을 통해 그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또한 성령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교회(헬. 에클레시아.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를 창설하시고, 교회를 통해 죄(=구원의 창시자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고 사람들을 죄에서 돌이켜 진리(=진리의 말씀, 복음, 예수님)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다(요16:8-11). 성령님이 운행하시는 교회는 죄에 매여 살아가는 세상을 뒤흔들며, 죄를 지적하고, 올바른 길(=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보여줌으로써 흑암의 세력에 대적하며 빛으로 나아간다. 물론 이 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지만(시2:2;마10:34-37;요15:18-20), 그럴 때마다 우리는 “성령님, 우리 교회에, 우리 가정에, 나에게 오시옵소서. 오셔서 나를 붙드시고 내 속에 있는 불의함을 제거해 주셔서 예루살렘에 핍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나아갔던 제자들처럼, 앞에 있는 어려움을 겁내지 않고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나아가면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신다. 

 

교회는 성령님의 강림을 통해 표적이 나타나고(방언 등의 은사. 고전12:8-10), 이러한 영적 체험을 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얼굴은 기쁨으로 충만하며, 믿음의 열정으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도시(=삶의 자리)를 놀라게 만들어야 한다(12절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막16:17-18). 그래서 우리는 소원해야 한다. “성령님, 우리 교회를 사로잡아 주옵소서. 나를 사로잡아 주옵소서. 권력과 물질이 우상이 되어있는 이 패역한 세대에 우리 교회를, 나를 사용해 주옵소서. 세상을 뒤흔드는 인생을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교회가, 우리가 이렇게 뜨겁게 기도하여 성령님께 완전히 사로잡힐 때 불신자들의 귀에 하나님의 말씀(=복음)이 우레 소리로 들리고, 마귀의 결박에서 풀려나는(행16: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놀라운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총회소개구독안내광고안내고충처리안개인정보취금안내 및 이용약관홈페이지 제작안내공지사항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04649 / 등록일 : 2017년 08월 07일
발행인 : 양재철 목사 / 편집인 : 송시웅 목사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노해로 81길 22-26(상계동) / TEL: 02-782-0933 / Fax: 02-782-3372 / 발행일 2005년 03월 02일
청소년보호 책임자 : 이은정 (02) 720-6839
Copyright ⓒ 2017 기하성총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