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 (마태복음 5장 1~6절)
김영근 목사(전라1지방회장, 곡성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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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7-09 10:48본문
불가능한 것과 가능한 것의 사이를 이어지게 하는 것이 있다면 ‘믿음’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스승이신 이신형 교수(한경직 목사님의 손자)는 그의 저서 ‘산상설교 해설’에서 ‘믿음은 예수가 우리에게 자신의 시선을 고정한 것처럼 우리의 시선을 예수에게 고정시키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시선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를 앞에 두시고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무리 보다 가깝게 제자들을 두시고 바라보시면서 약속된 축복 혹은 축복의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들은 제자들의 뒷모습과 함께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제자와 무리는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 나와 선 제자를 무리와 구별하여 인식하십니다.
지금 나 자신은 무리입니까? 아니면 제자입니까?
이 약속된 축복 혹은 축복의 약속은 나를 향한 예수님의 축복의 선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첫 번째 선언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주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의 마음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비워진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축복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고, 축복의 결과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흔히들 하나님 나라가 ‘나’ 라는 인격적 존재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가오는 것이지 사람의 존재 안에 내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가난한 마음이라 하신 말씀은 순수한 마음, 소박한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마음은 빈 마음을 의미합니다. 비워진 마음에 채워짐이 있습니다. 비워진 곳에는 담김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가난한 마음이 전제된 후에 하나님 나라가 축복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마음이 가난한 마음이다 하신 약속의 선언입니다.
두 번째, 애통하는 자에게 주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빈 마음에 임하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에서는 애통하는 자의 애달픔이 존재합니다. 축복된 현실에서 삶의 모순이 경험되고 아파하는 우리에게 미래에서는 지금의 삶의 모든 질곡이 회복되고 전도될 것을 기대하는 희망이 내재합니다. 이런 희망은 현실의 왜곡이 삶을 아무리 힘들게 하여도 내일의 시간에는 회복될 수 있다는 기대와 소망을 주시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이 축복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위로에 대한 이해를 담아야 합니다. 위로를 준다는 것은 아픔을 제거해 준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슬픔의 강도를 줄여 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는 것은 슬픔을 견뎌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후에 알게 되며, 슬픔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견뎌내는 모습에서 위로가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은 슬픔이고 고통이셨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시한 아들의 길은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아들의 ‘영광 돌림’ 역시 고통이고 슬픔이었습니다. 기쁨이, 기쁨이 될 수 없고 슬픔이, 슬픔이 될 수 없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세 번째, 온유한 자에게 주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현재적 실제적 축복도 함께 바라보고 있기에 종말론적인 희망 없이 삶의 현실이 가져다주는 왜곡과 무게를 참고 견뎌가야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위로와 약속이 현실의 모순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 않는 이상 완전한 축복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애통함의 마음에 주어지는 위로가 진정한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상태를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몸이 놓인 현실의 변화가 뒤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내주하시고 경험되면 현실의 아픔도 미래의 축복의 약속으로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 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성품이 유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격이 부드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위로를 받는 마음과 변화하지 않는 현실의 모순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자에게 약속된 땅은 지금 여기에 있는 땅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땅을 축복으로 보는 것은 마지막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슬픔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으며, 삶이 가져다주는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얻게 되시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네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의 목마름은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바라봄만이 만족함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백한 그리스도의 의 와 마르틴 루터가 시편과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를 깨닫고 고백한 그 의로우심을 우리가 갈망해야 합니다.
의를 갈망하는 것과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의를 갈망하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움에 의해서 모든 것을 의롭게 하시는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개념에 근거한 의로 하나님의 의로움을 규정하는 교만, 즉 하나님을 내 의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임하여 우리가 그 의로 의롭다 함을 얻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의 언약입니다.
다섯 번째는,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 주는 약속의 선언입니다.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의에 젖어들게 되면 이웃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축복받은 마음의 증거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갖고 있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처럼 유리하며 방황하는 사람들을 삶에 무게에 짓눌려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율법의 자구에 얽매여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 사람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삶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알지 못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우리들이 만들어 놓은 굴레의 삶, 율법 속에 지쳐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복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이 전이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함께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결과가 태동된 마음이기 때문에 감격스러운 축복입니다.
영생의 떡이며 영생의 물이신 예수를 먹고 마심으로서 예수와 한 몸이 된 제자만이 길과 진리이며 생명이신 예수 안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약속은 이루어질 것을 전제하며 예견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선언하신 약속의 언약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지금 함께 하시고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입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약속의 선언이라 믿고 맞이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하는 축복의 선언, 인간이 지킬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요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와 여러분들을 안타까운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과 그 의 안에 정답이 채점 되실 것을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말하고 마음은 눈앞에 보이는 이곳에 지금도 머물러 있음을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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