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빌 1:19~26)
최병기 목사(고양지방회 증경회장, 일산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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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9-12-12 09:55본문
요즘 국내 상황이 좋지 않게 국민의 안방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연일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것을 보면 모든 분야에서 불안한 마음과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세기의 성자요 세계의 양심으로 불리는 간디가 말했던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일곱 가지 죄악이 있습니다.
첫째는 원칙 없는 정치
둘째, 노동 없는 부
셋째, 양심 없는 쾌락
넷째, 인격 없는 지식
다섯째, 도의 없는 기업
여섯째, 인간성 없는 과학
일곱째, 희생 없는 신앙입니다.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이런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삶은 희망이 없는 삶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20~21절 말씀을 보면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을 의식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오직 주님만을 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이 말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말입니다.
찬송가 93장 작사 작곡가 라마틴 톰슨은 찬송시에 그리도인의 부끄러움 없는 삶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되시니 구주 예수 떠나가면 죄 중에 빠지리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내 맘에 근심 쌓일 때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그렇습니다. 예수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1.물질 관계에 깨끗해야 합니다.
사람을 아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물질을 주면 도박하는 사람은 도박장으로, 술 좋아하는 사람은 술집으로 간다고 합니다. 돈은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는 본래 귀한 그릇이었지만 물질 때문에 더러워진 바 있습니다. 발람도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물질 때문에 삯꾼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아간도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물질 때문에 더러워지고 돌무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좋은 사람이었지만 물질 때문에 베드로 앞에서 거짓말하고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물질에 깨끗해야 합니다.
2. 이성에 깨끗해야 합니다.
말세에는 노아의 때와 비슷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와 비슷합니다. 음란한 바람이 온천지를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이성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셉은 이성에 깨끗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고 복음 받았습니다.
3. 명예나 권력에 깨끗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 칭찬 받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상의 권력과 명예보다 하나님 앞에서 받은 직분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받는 자 같으나 우리가 죽임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한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입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명예보다 세상 권세 권력에 깨끗해야 합니다.
4. 생각이 깨끗해야 합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악한 생각, 탐심, 음란 방탕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합니다. 이런 것들이 어디서 생산됩니까?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악한 것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결국 이것들이 부끄러운 삶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깨끗하게 합시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일생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라고 했겠습니까? 바울의 최대 관심은 오직 주님이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영화롭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존재 의미는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 죽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못합니다. 물질 중심 쾌락 중심, 자녀 걱정, 건강 문제, 그저 세상 것들이 가득 합니다. 바울처럼 너희 염려와 근심은 주께 맡기라,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높여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항상 남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본문 22~26) 바울에게는 개인적인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서 이 세상을 떠나 주님께 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훨씬 더 영광스러운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22~26절을 요약합니다. “나의 개인적인 소망은 빨리 주님께 가고 싶지만, 여러분의 유익을 위하여 나는 아직도 육신의 생활을 더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애양원 나병 환자를 위하여 사셨고 주기철 목사님은 민족의 유익을 위하여 살다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바로 이러한 삶이었습니다. 칼힐티가 남긴 말 가운데 “인간의 마음은 보람 있는 일을 찾을 때처럼 즐거운 기분을 느낄 때는 없다.” 보람 있는 일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헤밍웨이는 “선이란 무엇인가?” 뒷맛이 좋은 것이 남에게 좋은 일을 하고나면 긍지와 보람, 만족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좋지 않은 일을 하면 뒷맛이 좋지 않습니다. 얼굴이 어둡고 마음이 괴롭습니다.
교육의 성자 페스탈로치 묘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남을 위하여 자기를 위해선 아무것도 안했다.” 페스탈로치 생애를 다시 한 번 생각 하면서 우리의 삶도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만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은 이해 못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형제를 저울질하고 돌을 던지는 악담을 하는 혹은 비판하는 자세는 신앙인의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바울은 사랑이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 했습니다. 남을 생각하면서 산다면 우리나라 우리 사회 우리 가정 아름답고 행복할 것입니다.
결론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삽시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을 삽시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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