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은혜를 이해하기(로마서 1:17)
김영근 목사(곡성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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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8-06-29 14:05본문
마르틴루터는 1517년 오직 의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전해지는 하나님의 의가 전가되어질 때 의인이 된다는 로마서의 말씀을 깨달았고, 복음과 은혜를 재조명하고 종교를 개혁하였습니다.
우리는 전혀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여김을 얻은 것입니다.
그로 인해 믿는 자와 예수그리스도가 새로운 관계 속에 있게 되는데 이는 성령을 통하여 복음과 은혜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즉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시대에 복음적인 은혜의 신앙관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까요?
첫째로 주님과 편승 하는 신앙입니다.
노아의 때에 심판을 면하고 살아남는 조건이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이나 행위나 도덕적 선행이 조건 되지 않았습니다.
그냥 배에 올라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방주의 배에 편승 하는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 가족 구성원이 그 시대에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작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방주에 편승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사건 역시 문설주 어린양의 피로 인한 공로 이지 문설주 에 어린양의 피가 안 바른 다른 집과 비교해서 죽음의 사자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다른 것보다 우선으로 주님의 은혜와 복음의 말씀 안으로 편승해야 합니다.
편승하게 되면 비로소 은혜의 결과를 보게 되고 연합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회개와 성화를 맺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에 대한 응답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복음의 의를 깨닫고 받아들여 선택과 결단과 신뢰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신앙은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은혜의 말씀에 대한 수동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고, 그리고 신앙은 우선 지적 기능과 양심의 조명과 감화를 통하여 일어나며 정서와 의지와도 관련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이란 하나님의 율법 혹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자기 자신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복음의 의를 깨달으며 양심의 위로와 안위를 얻고 정서가 안정과 평화를 얻음과 동시에 자유를 얻어 새로운 선택 새로운 결단, 그리고 참된 신뢰에 이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입은 우리는 그에 맞는 응답을 드려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의와 우리의 의를 구분하여야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에 관하여 기록하였고 마르틴루터는 “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말씀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죄가 없다는 것으로 취급하시는 그 의라는 걸 깨달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불의한 사람들을 공평하게 처벌하시는 분으로 만 생각하지 말고 의를 내리시는 분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의 마음에서 해방의 길을 담아 주신 것입니다.
반면 우리의 의는 털끝만치도 흠 잡을 데가 없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괴로운 죄인이기 때문에 도무지 자신의 공로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도 본질상 우리의 노력으로 그분을 몇%나 닮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의 한계입니다.
아리스토델레스는 의는 행동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의 가 행위에 선행됩니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의하여 선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철학에서나 사람들이 보통 이해하는 의는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하신 복음의 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구원을 일으키는 칭의 인 반면에 우리의 의는 세상 적인 의요 육에 속한 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의요 도덕적인 의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올바른 행위로 의로워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 만일 그같이 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또 의로운 사람이기에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요 먼저 성품이 변해야 그 결과로써 행위도 바뀌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항상 기억 되는데 “ 작은 돌은 물에 뜨고 큰 돌을 물에 가라 안냐?” 하는 것입니다. 크던 작던 돌은 다 물에 가라 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 의 곁에 서있어야 은혜와 넘치는 사랑을 보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마지막은 갈보리 십자가위의 예수님을 직시 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위의 완전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보혈과 의로 우리의 죄와 사망의 권세가 도말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죄송하게도 예수님은 또 다시 십자가위에 올라가셔야만 되는 것이 됩니다.
이미 문제는 해결 되었는데 모르고 직시하지 못하고 과거에 억매인 신앙은 불신앙입니다.
오래전 KBS 교양강좌에서 도올 김용옥 이란 사람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운명 직전 절규하며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운명한 말씀은 스스로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님을 증명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유는 세상의 죄를 가지고 죽음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죽는 것은 큰 승리이고 영광이 아니냐? 그 영광의 절정에 왜 비명과 절규를 하고 죽느냐 그것은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착각하고 살았다가 비로소 죽기직전 보통 인간임을 깨닫고 죽는 것을 스스로 증명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방청관객들을 향해 소리치니 박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저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인간이 겪는 최고의 아픔과 고통 두려움 죽음의 고통조차도 경험하시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격리조차 이겨내시고 우리를 이해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동승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철학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위의 예수그리스도를 새롭게 보고 하나님을 새롭게 보시길 바랍니다. 곧 고난 받은 구속자와 갈보리 위에서 가려졌던 하나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의 은혜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노여움과 은혜사이의 갈등이 해결되어지고, 굴곡진 우리들의 삶의 모순이 풀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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