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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 특별설교 / “역경 속에서의 감사 찬송” (사도행전 16장 19~34절)

양재철 목사(증경총회장, 광장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24-11-13 13:23

본문

양재철목사.jpg

오늘 감사절을 맞이하여 드릴 말씀의 제목은 ‘역경 속에서의 감사 찬송’입니다. 1620년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6일) 영국 청교도인 102명(남자 78명 여자 24명)이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떠났습니다. 66일간의 어려운 항해를 거쳐 그해 11월 21일(율리우스력 11월 11일) ‘케이프코드’에 도착했습니다. 원래 목적지는 ‘제임스타운’이었습니다. ‘메이플라워호’는 항로를 이탈했고, 겨울이었기 때문에 ‘케이프코드’에 머물면서 월동(越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절망으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1621년 3월 31일(율리우스력 3월 21일), 겨울 동안 배 안에서 살아남은 승객들은 매사추세츠 프리머스 해안까지 이동했습니다.

 

이듬해 봄, 인디언들이 찾아와 옥수수, 밀, 보리, 완두콩의 종자를 주고 씨뿌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을이 되자 피땀 흘려 거둔 첫 수확을 쌓아 놓고 감사 예배를 드렸으며, 인디언을 초청하여 칠면조와 팬케이크를 굽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의 시작입니다. 

 

1864년 링컨 대통령은 11월 제4 목요일을 감사절로 선포하며 “우리의 경건한 조상들이 이 아메리카 땅에 감사의 씨를 뿌린 그 신앙을 자손만대에 이어주기 위하여 이날을 국가 축제일로 정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역경 속에서의 찬송’이란 ‘칠흑 같은 밤의 찬송’과 같습니다. 이사야 21장 12절에는 “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밤을 인생의 역경에 견주고 아침을 순경에 견주어 주야가 반복하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순경과 역경이 교차 되어 찾아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경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첫째로, 역경 속에서도 감사하며 찬송한다는 것은 성도의 특징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전도하다가 잡혀 매를 맞아 상처가 나고 옥에 갇힌 후 밤 중에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역경 중에 드려진 찬송’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칠흑 같은 밤에 드려진 찬송’의 실제 예를 구약의 욥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욥기는 고난의 책으로, 욥이 겪는 고난은 의로운 고난입니다. 그는 스스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엄청난 시련을 겪습니다. 욥은 동방의 갑부로, 재산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원수들이 와서 모든 것을 약탈하고 불을 지르면서, 그는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또한 욥은 열 명의 자녀를 둔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의좋게 살면서 부모를 기쁘게 했습니다. 어느 날 맏형의 집에서 잔치를 하던 중, 갑자기 집이 무너져 열 남매가 모두 몰살당하게 되었습니다. 태풍으로 인해 집이 무너진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자랑이자 기쁨이던 열 남매가 모두 그렇게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끔찍한 일들이 아무런 예고 없이 닥쳐왔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욥은 위대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엄청난 고난 속에서도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욥 1:20)하며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는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욥 1:21).

 

이처럼 욥은 자신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경배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욥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욥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찬송을 받으시옵소서”라고 찬양을 돌리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더 깊어져 갑니다. 욥의 아내는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욥을 저주하며 집을 나가버립니다. 그 시점에서 욥은 몸까지 병들기 시작합니다. 종기가 낫지 않아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왓장으로 긁으면서 괴로워했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 중에 세 친구가 욥을 위로한다고 찾아 왔지만, 그들의 방문은 욥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찾아와서는 세 가지 충고와 함께 한 가지 권면의 말을 전합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욥 36:24). 엘리후의 이 말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욥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찬양했으며, 이로써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고난이 닥칠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떤 형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찬송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찬송’이란 히브리어로 ‘할랄’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찬양하다’, ‘칭찬하다’, ‘자랑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밤에 드리는 찬송’은 역경 가운데서의 감사를 말합니다. 깊은 깨달음이 있을 때에는 어디에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신앙을 바로 고백하는 순간에 어디에서든지 찬양할 수가 있습니다. 찬송은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은혜에 대한 간증입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 전쟁과 기근, 전염병,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증가하면서 기후변화가 생태계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또한 개인적으로도 역경이 중첩(重疊)해 있을 때일수록 진정한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며 밤 같은 어두운 시간에도 영광의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특권일 것입니다. 


둘째로, 역경 속에서 감사 찬송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도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혀 매맞은 상처가 쓰라리고 아플 때, 그들이 당한 일들에 대해 의아함과 석연치 않은 감정을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아시아 전도를 막으셨을까?” “드로아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빌립보로 건너왔는데, 우리를 옥에 가두기 위해 빌립보로 보내신 것일까?” “점치던 여자를 고쳐 주고 그의 영과 육을 다 구원시켰는데, 그 대가가 매맞고 옥에 갇힌 것이라니,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이러한 질문 외에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고민과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 중에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원망스러운 생각은 사라지고,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갔다고 합니다. 믿음이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안심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과 과학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은 갈 길이 분명하며 증거가 확실할 때만이 움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 질 때 갈 바를 모르며 그 곡절(曲折)을 알지 못하면서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요 13:7)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이란 현재 알지 못하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할지라도, 장차 알 날이 오고 그것이 유익하게 될 것을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어느 부인이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결혼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이 날마다 권면하지만, 그는 술을 좋아해서 저녁마다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간신히 집을 찾아 들어오는 형편입니다. 이런 남편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라고 부인은 고생이 많았습니다. 

어느날도 역시 밤늦게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남편이 또 엉망으로 취해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방으로 옮겨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주니 남편은 자리에 누워서 세상모르고 자는 것입니다. 부인이 그 옆에서 기도하다가 생각해보니 신세타령이 나옵니다. ‘이게 무슨 꼴이람, 이러려고 결혼했나,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나….’ 섭섭하고 원망스러운 생각에 이제 눈물까지 흐릅니다.

 

그런데, 성령이 감동하셔서 문득 지난 주일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부인은 감사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작정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없습니다마는 좌우지간 감사합니다.’ 그랬더니 감사할 것이 본격적으로, 구체적으로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속 썩이는 남편이라도 없는 것보다 낫지. 저렇게 술이 만취되어 가지고도 사고당하지 않고 자기 집 찾아오는 것을 보면 장하지. 언젠가는 저 사람도 사람 될 날이 오겠지.’ 그뿐입니까? 술을 그렇게 많이 먹어도 아직까지 건강하니 감사하고, 본인은 교회에 나가지 않지만 나까지 못 나가게 하는 것은 아니니 감사하고...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니 감사할 것 천지더랍니다.

 

옆에 누워 자던 남편이 목이 말라서 눈을 떠 보니 아내가 히죽히죽 웃고 있는 게 아닙니까? “무엇이 좋아서 웃소?” 하고 물으니 그 부인이 대답합니다. “사실은 정말 고마운 것이 많아서 그래요.” 그리고 고마운 것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했더니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말하더랍니다. “예수를 믿겠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여러분~! 우리는 감사하다는 말이 어떤 사건 뒤에 나오는 것인 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감사가 기본입니다. 먼저 해결을 한 후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한 후에 해결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셋째로, 역경 중의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의 이적을 부르는 전주곡입니다. 

 

여러분, 지금 바울과 실라가 처한 형편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매를 맞고 빌립보의 ‘깊은 옥(獄)’ 즉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매 맞은 곳에서는 피가 흘렀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발은 차꼬에 든든히 채워졌기 때문에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바울과 실라는 밤중에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25절).

 

시편 기자는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시 42:8)”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고난 중에도 기도하고 찬송하니 어떻게 되었습니까?(26절) 그렇습니다. 고난 중의 기도와 찬송은 하나님의 이적을 부르는 전주곡입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하나님 찬양하기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감사했으며 풍랑 속에서도 감사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이처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다메섹의 경험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예수 그리스도를 빛 가운데 만나 개인적인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고백합니다(빌 4:11-12). 그에게 상황과 형편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쁨과 감사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였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우리들은 먼저 감사할 것입니다. 더 깊이 찬송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송을 온전케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진실한 찬송이 나오기까지 어떤 방법으로라도 주님의 경륜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깨닫고 찬송하고, 믿고 찬송하며, 경건하게 찬송합시다! 

 

사랑하는 총회원 여러분,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올려드린 감사 찬송이 능력이 되어, 옥터가 진동하고 감옥의 문이 열려 매인 것이 다 벗어진 것처럼, 여러분의 삶과 인생의 문제 앞에서도 감사와 찬송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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