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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야 사는 길이 여기에 있다 (눅 14:26-28,33)

황현기 목사(청주남지방회장, 새로남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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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3-04-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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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기 목사.jpg

운전을 배우고 자동차를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매형이 입원해 있는 서울 마포구 신정동의 한 병원을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이야 내비게이션이 있지만, 그 당시 서울 한 병원을 찾기 위해서는 인터넷에서 지도를 출력해 다녀야 했습니다. 

 

같은 자리를 돌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창문을 열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으나, 모른다고 답하시는 분이 대부분이었고, 아시는 분이 설명을 해줘도 병원을 찾는 일은 어렵기만 했습니다. 답답해하고 있을 때, 마침 신호대기 중인 경찰에게 물었더니 뒤에 앉아계신 부모님을 보고 직접 앞에 차를 앞에 대고는 따라오라 손짓을 했습니다. 큰 사거리를 지나 좁은 길로 몇 번 진입하니 금세 병원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길을 알아야 길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본디 종교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답을 주어야 합니다. 목회도 이와 같습니다. 누군가 길을 물을 때 서슴없이 답을 한다는 것은, 이미 가 본 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참 길이 많습니다. 어떤 길로 접어드느냐에 따라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가는 길이 다릅니다. 저마다 선택한 길로 가겠지만 우리는 어떤 길을 가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1. 배움의 길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는 무조건 배우는 사람을 일컫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도(道)의 길이기에 스승이 가르치는 도를 행하고 따르는 자가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에게 배우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주님의 길은 따르면서 배워야 합니다. 따른다고 결단하는 것은 제자가 되는 길로 접어든 것입니다. 제자가 되려면 그분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그 길은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이지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요, 고난의 길에 들어서겠다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면서 그분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분의 길이 내 길이 되고, 그분의 삶이 내 삶이 되며, 그분의 성품이 내 성품이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따름으로써 그의 제자가 되고, 그처럼 살아감으로써 그분을 닮은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지나 부활주일을 맞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고, 그분을 따름으로써 참 제자가 되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생명이 우리 속에서도 영글어야 합니다. 


2. 기쁨의 길입니다.


우리는 왜 기쁨을 기쁨으로 여기지 않을까요? 소망의 본질이 기독교 안에 있다 설교하고 있지만, 성도들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 역설적인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가벼이 덜렁덜렁 따라나설 수 있으나 알고는 선뜻 나서지 않으며 따라가지 않을 걸림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지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주라’고 하고, ‘채우겠다’고 하는 자에게 ‘비우라’하며, ‘얻고자 하는 자’에게 ‘버리라’고 한다면 이 가르침에 고민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가다 걸려 넘어지고, 넘어지고 나면 돌아서게 되는 것도 이 이유일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가 예수님에게 등을 돌렸으며, 제자들도 예수께서 병사들에게 붙들리게 되었을 때 버리고 도망을 쳤을까요.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자기의 스승을 팔아버린 가룟유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이 따라온 길이 애초에 소망했던 길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부인하고 떠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질문했던 부자에게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막10:21) 주님의 말씀에 그는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며 떠나가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 길에서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세 번이나 예고하신 주님의 의도는, 이 길을 따르려면 고난과 희생의 길을 각오해야 하는 데 그래도 따르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14:26-27) 

 

예수님은 가진 것을 버리라 하십니다. 버릴 수 없는 혈연까지 버리고, 자기의 목숨까지도 버리라 하십니다.


3. 버리는 길입니다.


‘버리라’라는 속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33절에 ‘소유’라는 말에 이 질문에 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혈연이나 자기 목숨이라는 것이 포기할 수 없는 소유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버릴 수 없는 그것까지 굳이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러한 소유가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것에 의지하여 부지되는 목숨이라고 하는 것도 언젠가는 죽음에 삼킨 바 되어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과 삶의 허무한 실상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12:13-21)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재산이 아무리 많아도 그 재산이 목숨을 늘려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죽음 앞의 우리 삶이요, 우리 목숨의 한계입니다.

 

목숨은 살고자 합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목숨의 본질이니까요. 그래서 이 땅에 사는 대부분 사람은 더 많이 얻고자 하고 소유하고자 합니다. 가진 것이 삶의 안전을 보장해 주리라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35여 년 목회의 길을 걸어오며 작은 깨달음이 있다면, 소유가 꼭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육신으로 치우친 소유의 삶은 살아있되 이미 반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허상을 폭로시키는 것이 인생의 죽음입니다. 살고 싶어도 정해진 때가 오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이러한 삶과 목숨을 바울은 죽음에 종노릇 하는 삶, 죽음에 삼킨 바 된 목숨이라고 말합니다.

 

씨앗이 떨어져 땅에 묻히고 봄이 되어 새싹이 돋아나 꽃이 피듯, 우리 앞에 놓인 영적 삶의 길에 숭고하고 값진 것을 위해 믿음의 꽃을 먼저 피워야 합니다. 마가복음 8장 25절에 누구든지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와 내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원할 것이라는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주며 버려야 얻게 된다는 진리를 되새기길 바랍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며 특별새벽기도회를 교회에서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생각하고 그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되새기는 데 있습니다. 그분이 대속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더라면 어찌 부활을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씨앗이 죽지 않고 살 수 없듯, 예수님의 부활도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부정하고 희생을 하여 구원을 이루시는 것처럼 희생 없는, 자기부정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목회가 공허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다면 나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돌아가신 그분의 십자가의 죽음을 깊이 묵상해 봅시다. 죽어야 사는 부활의 길이 있다고 하시며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그분이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목회 안에 다시금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의 성경은 표준새번역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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