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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저입니다” (막 15:6~15)

고석환 목사(군선교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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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3-10 09:58

본문

고석환 목사.jpg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엄청난 사건현장에 나타나는 몇 명의 주요 인물 중 반드시 쳐다보아야 할 사람이 바로 바라바이다. 단순하게 보면 예수님이 재판 받을 당시 명절 특사에 의해 처형될 예수님 대신 특사의 혜택으로 살아난 사건이다.


재판장은 빌라도이며 배심원은 군중들이고 판결 즉시 처형될 사람은 예수님 아니면 바라바다. 결과는 죄 없는 예수님을 사형수로 판결하여 십자가에 매달고 바라바라는 공통적인 죄인은 예수님을 대신하여 사면의 방법으로 살려 주었다.


2000년 전 빌라도의 법정에 찾아가 나 자신이 빌라도요 배심원은 군중들이며 또 흉악범 바라바의 위치가 되어 지금 우리는 어떤 선택과 어떻게 판결하며 어떠한 의미로 사는지 자신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一. 재판장 빌라도


빌라도는 예수님께 “나는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요19:18)라고 말한다. 빌라도는 그가 말한 대로 큰 권세를 받은 사람이다.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권세다. 사람이 큰 권세를 받았으면 그 권세를 반드시 좋은 일에 사용해야 한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위에서 주신 권세가 아니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다 라고 하시며 인간의 권한의 한계를 말씀하신다.


위에서 즉 하나님이 주신 권세라면 반드시 옳은 일에, 정의로운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 한계를 넘어가면 안 된다. 빌라도가 법관의 양심과 정의로 볼 때 예수님에게 죄를 찾아볼 수 없었다. 빌라도는 권세자의 양심으로 또 자기 부인의 권유에 의해서라도 죄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당연히 석방해야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정의와 양심의 선택보다 군중들의 인기를 의식하고 정의로운 양심보다 자기 지위를 보존하는 것으로 양심을 버리고 잘못된 판결을 선택했다.


옳지 못한 권세자에 의해 잘못 판결되는 모순은 인류 역사와 편승하며 적지 않게 오류를 범하며 내려왔다.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사람들은 평생 살며 나 스스로가 자인하여 남을 판결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자신하며 행동한다. 이 권세가 공인된 것도 아니고 나 혼자만의 스스로 가진 권세자가 되어 남을 판결하는 목소리는 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권세를 실행하는 순간에 전능자 앞에서 내 양심에 합당하느냐 하고 항상 살펴야 한다. 이세상은 요란한 법정이다. 국민 너나 할 것 없이 주변의 사람들을 판결하려고 한다. 인터넷 트위터 문자 등을 도구로 하고 두서명이 모인자리에서도 각자의 소리로 남을 판단하려고 한다. 스스로 명판사라고 자인하면서.


그러면 피고는 누군가? 당연이 언제나 나는 피고가 아니다. 나는 언제나 판결자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놀랍고 무서운 것은 내가 재판장인 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기도 하고 죄인 바라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내가 빌라도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의 역사를 알면서도 나 자신은 두말 할 것 없이 바른 판결을 하지 못하고 바라바의 편에 설때가 많다는 것이다. 나에게 권세가 있다면 예수는 죄가 없다. 그분은 의인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해야 한다. 군중이 무서워, 자기 자리가 무서워, 타인에게 눈치보일까봐 불의를 선택하고 의를 버릴까 조심해야 한다. 반드시 그 책임을 물을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二. 죄인 바라바


눅 23:19 바라바는 성중에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옥에 갇힌 자라고 소개한다. 마 27:16 바라바라고 하는 유명한 죄수라고 했고, 요 18:40 바라바를 강도라도 기록한다.

 

종합해보면 당시 로마에게 나라를 뺏기고 로마의 지배아래 살아야 하는 유대의 젊고 혈기 왕성하여 로마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독립운동하는 열심 당원들이 활동하던 때였기에 바라바도 그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한다. 민란을 일으키며 민중을 선동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당시 유대왕 헤롯정부의 무능함과 나라 뺏긴 울분에 곳곳에서 시위와 폭동을 일으키고 반 로마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다 보니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찾아 폭력 내지 살인까지 저지르고 부유한 유대사람들의 재산을 독립운동자금 명목으로 갈취하여 강도라고 불려지기도 한사람이다.


그는 로마라는 침략자 나라를 증오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영웅 같은 존재이며 바라바는 자신의 행동이 독립을 바라는 모든 종족들에게 정의로운 일이라 여기며 산 것이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아덴만 해안에서 타국의 상선들을 납치하고 강탈하여 세계의 비난을 받지만 실상 소말리아에서는 영웅대접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빌라도의 눈으로 보면 바라바는 로마의 적이다. 유대를 로마의 속국으로 평정시켜야 하는 정책에서 바라바는 반드시 처형해야 할 자이며 실상 사형선고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예수는 민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폭력적으로 사람을 해하거나 타인의 재산을 탈취하지도 않았고, 자비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로마에 전혀 해가 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라고 명령했다.


빌라도는 그가 가진 큰 권한을 아주 크게 잘못 사용한 것이다. 왜? 군중의 여론 때문에, 유대종교지도자들과 민중의 시기와 질시의 참소 때문에.


우리가 빌라도라 해도 아니 언론의 자유가 있는 군중의 한사람이라 해도 그릇행하지 말아야한다. 내 양심을 어둡게 하는 시기와 참소 때문에 의로운 것이 죄된 것보다 더 죄로 보고 의보다 죄를 선택하는 나의 법정에 오판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때가 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사람에게 내려진 크고 작은 권세는 오직 위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三. 풀려난 바라바


2000년 전의 역사 속에 당시 빌라도와 바라바, 유대의 제사장들이 어떤 결과를 나았든지,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인류 구원을 완성시키셨고 그 일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 하나님의 뜻대로 성취되었다. 다만 지금 우리는 바라바를 나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나의 신앙을 위해 나에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바라바를 흉악범 잡범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다. 평가에 따라 의사 열사 혁명가 독립운동가라고 평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감옥에 갇혔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곧 죽게 될 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극적인 순간에 살아났다. 예수께서 그 대신 십자가에 달려죽었고 명절특사는 바라바의 것이 되어 석방되어 풀려났는데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받아야 하는 명절특사를 그가 받았음으로 결과는 죄된 자신을 대신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바라바는 죽을 몸이 구원받아 살아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죽음 직전에 만났고 예수대신 석방되고 살아나 과연 어떠한 생애를 살았을까? 우리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유대의 전승과 역사가들에 의해 그의 생애를 추적해 볼 수 있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리차드 풀레셔가 만든 영화배우 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바라바를 보면 상당부분을 동감하게 된다.


자신도 알지못한 이상한 운명에 의해 죽음 직전에 살아난 바라바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 똑같은 민중선동가로 폭력과 범죄를 저지르다 다시 체포되어 무시무시한 지하 광산으로 끌려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죄수로 살고 거기서도 이상한 이끌림으로 석방되어 살았는데 다시 로마의 검투사로 생활하며 늘 번민만하며 괴로움으로 살게 된다.


자기 대신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구원자라면 내가 하던 민중봉기자로서의 모든 폭력과 혁명적 현장에서 자신을 도와 로마를 몰아내고 유대를 해방시킬 수 없었는가 하는 의심, 그 의심이 떠나지를 않으면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분의 신성과 알 수 없는 영혼의 소리가, 거칠고 험악한 자신의 현 환경과 정립되지를 않아 몸부림친다. 그가 처한 환경은 항상 최악의 상황인데 그때 만난 예수와 자신의 운명에 결합을 찾지못해 거칠고 험한 반항적 자신의 영혼에 밀려오는 그 어떤 신비한 영감을 벗어나려고 사사건건 반항적인 행동을 하다가 결국 다시 잡혀 사형수로 십자가에 매달리게 된다.


그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순간에서야 멀리 영원을 바라보며 자기영혼을 포기하지않고 붙잡고 있는 구원자 예수를 바로 보고 깨달으며 인정하게 된다.


마지막 운명직전에 바라바는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고백으로 자기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한다.


“주여 저 바라바입니다.” 로마의 전승으로는 이 바라바를 순교자로 명하여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반항하고 몸부림치고 내 맘대로 정의를 내리고 살아왔어도 종래 내 영혼 깊은 고백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이름을 불러가며 죽을 수 있는 신앙의 중심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을 때에도 신실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


“주여 저 바라바입니다 당신 때문에 살아난 바라바입니다.”
“주여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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