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받은 나귀” (마가복음 11장 1~10절)
임운택 목사(경기남지방회장, 안중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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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4-08-13 12:54본문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왕으로서,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왕이나 개선장군이 타는 것과 좀 다른 것을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세상의 왕이나 개선장군은 보통 말을 타고 입성합니다. 깨끗한 백마나 멋진 흑마를 탑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나귀를 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스가랴 9장 9절에 보니까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왜 나귀 새끼를 타셨다구요?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닮으시길 축복합니다.
자, 그런데 오늘 저는 예수님이 타고 가셨던 나귀 새끼에 초점을 맞춰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 나귀 새끼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짐승입니다. 누구도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나귀 새끼에 주목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을 보세요. 대단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주님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짧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짧은 인생,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하여 주님께 쓰임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매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2절에 보니까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나귀는 어디엔가 매여 있습니다. 쓰임 받기 위해서는 매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무엇엔가에 묶여 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게임중독에 묶여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 보니까 20세 청년이 하루 10시간 이상씩 게임을 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위험한 수술을 다 마치고 깨어나서 제일 먼저 뭘 찾았을까요? 바로 게임기입니다.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여러 모양으로 사람들을 묶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습관이나 관계에 묶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 묶여 있습니다. 그것이 구원과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쓰시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묶인 것을 풀어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모든 묶임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매임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게 하리라!
2. 야생의 습성을 버려야 합니다.
2절에 보니까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라고 했습니다. 이 나귀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아무도 타보지 않았다는 것은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짐승이든지 길들여지지 않으면 야생의 습성이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을 태운다는 것은 불편한 것입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는 야생의 습성대로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쓰임 받기 위해서 야생의 습성을 버리고 길들여져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를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훈련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군병입니다. 예수님의 군사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훈련이 인내라면,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만나게 하실까요? 인내할 수 있는 일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인내라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모난 부분을 다듬길 원하신다면,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게 하실까요? 모난 부분을 다듬고, 부드럽게 할 사람을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잠언 27장 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야생의 습성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훈련하실 때, 그 훈련을 잘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피하지 마시고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
3. 주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면 안 됩니다. 주님이 원하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자기 맘대로 갔다가 목이 잘린 말이 있습니다. 신라시대 김유신 장군이 화랑 시절에 천관이라는 기생에게 푹 빠져서 훈련을 게을리했습니다. 어머니 만명부인이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나는 늙어서 밤이나 낮이나 네가 가문을 빛내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너는 기생집에나 드나들고 있느냐?”
화랑 김유신은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말을 타고 집으로 가는데, 피곤해서 졸다가 깨어보니까 천관이라는 기생의 집 앞이었습니다. 김유신은 화가 나서 칼로 목을 쳤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목을 치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쓰임 받기 위해서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주님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디인가,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4. 쓰임의 때를 누려야 합니다.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셨지만, 계속 타지는 않으셨습니다. 무슨 얘기일까요? 우리가 쓰임 받을 때가 있고, 쓰임 받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나귀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데 까지가 자기 임무인데, 자기가 더 하고 싶어서 골고다까지 가겠다고 한다면, 십자가 지고 가실 때 제 등에 타고 가시라고 한다면 얼마나 우스울까요?
여러분,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가 지나면 내려와야 합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출애굽부터 광야 40년까지만 모세라고 하는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게 모세에게 정해진 시간이었습니다. 모세는 더 가고 싶었습니다. 건강도 괜찮았습니다. 눈도 흐리지 않았습니다. 느보산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수아라는 새로운 나귀를 타길 원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 사명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자신을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로 했습니다. 소리는 말씀을 전하고 사라집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어느 자리에서 쓰임 받고 있건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이 허락하신 시간까지만 섬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섬길 수 있을 때 잘 쓰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쓰임을 받고 있을 때, 예수님을 태우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뭔가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을 때, 직분과 물질과 건강과 은사를 주셨을 때, 그때 잘 쓰임 받아야 합니다. 쓰임의 때를 누려야 합니다.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해 쓰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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