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ght_maket_banner.png
순복음홍성교회 라동옥 목사가 직접 농사지은 벌꿀판매
이태근 목사와 함께하는 아침묵상
본교단 업무협약 업체 / 기하성회원 특별우대
홍영건장로
하나로의료재단
종교인과세

사랑할 때가 있다 (전 3:1~11) > 설교

본문 바로가기

사랑할 때가 있다 (전 3:1~11) > 설교




최근에 많이본뉴스
오피니언
특별기고란
rray ( 'count' => '0', ), ), )?>
목자의 뜰

사랑할 때가 있다 (전 3:1~11)

신동철 목사(충서지방회장, 순복음이레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24-06-11 14:52

본문

신동철 목사.jpg

모든 일은 때가 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일하신다. 때를 놓치면 안 된다. 때를 따라 일하는 것이 지혜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사랑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트로이 목마처럼 애굽 공주의 양아들로 보낸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모세만 왕궁으로 간 것이 아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도 함께 왕궁으로 갔다. 

 

출애굽기 2장 7절~9절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아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머니다. 더구나 젖을 먹이는 시점이 중요하다. 어머니가 가슴으로 젖을 먹이면 아이는 편안함을 느낀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이 시기에 모든 것을 배우고 느낀다.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면 애정 결핍으로 여러 유형의 병리 현상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세를 교육할 때 애굽 학문을 배우게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정서, 역사 교육은 어머니를 통해 배우게 했다. 만약 요게벳이 모세와 함께 있지 않았으면 모세는 애굽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아이가 어릴 때 엄마는 항상 함께 있어야 한다. 아무리 바쁘고, 어려워도 이때 떨어져 있거나 충분히 안아주지 못하면 아이는 불안하다. 산만하고 주의력 결핍증이 나타난다. 

 

레위기에는 산후조리에 대한 말씀이 있다. 레위기 12장 1~5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아직은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 

 

재미있는 것은 남자는 33일, 여자는 배가 되는 66일이다. 왜 그랬을까? 요즘은 딸을 낳으면 좋아하지만 남자 중심의 사회에서 딸을 낳으면 미역국도 못 얻어먹고, 욕만 먹었다. 이것이 딸 낳은 여자의 죄다. 우리 문화나 유대인들은 여자가 다 뒤집어쓴다. 그래서 산후조리를 율법으로 정했다. 산모를 보호하는 법이다. 우리나라가 보통 산후조리를 한 달 정도 하는데 유대인들도 그렇다. 그런데 여자를 낳으면 66일을 하라고 오히려 늘렸다. 남자보다 산후조리를 더 잘해야 나중에 여자는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철저하게 산모, 여자를 보호하는 법이다. 할 수 있으면 누구에게 맡기지 말고 내가 품고 자고, 어쩔 수 없이 떨어져 있으면 그 시간만큼 충분히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보충해 줘야 한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할 때가 있다. 부모가 필요할 때가 있다. 이때를 놓치면 안 된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사랑할 때가 있다. 


부부 사이에도 사랑할 때가 있다. 

 

성경에서 사라는 가장 모범적인 현모양처다. 남편 아브라함을 주님처럼 섬기며 순종했다. 베드로전서 3장 5~6절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사라의 순종을 보자. 이사 가자고 하면 간다. 처음 아브라함이 살고 있던 곳은 메소포타미아 강 주변이다. 우르는 당시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이다. 우르에서 하란으로 갔고, 거기서 다시 가나안으로 갔다. 요즘 이사할 때 가장 큰 입김은 엄마다. 엄마가 이사 하자고 할 때 가장 최우선으로 보는 것이 아이 교육이다. 그다음이 문화 환경이다. 살림은 여자가 하는데 편리해야 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당시 가장 좋은 교육, 문화 환경을 떠나 이름도 없는 가나안으로 이사를 가자고 한다. 물론 아이는 없었다. 그러나 살림 사는 입장에서 머뭇거릴 수도 있다. 사라는 무조건 남편을 따랐다. 남편의 하나님을 따랐다. 신앙을 따랐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 사라가 “너무 예뻐∼” 이것이 문제다. 미인을 데리고 사는 남편은 다른 남자의 질투를 조심해야 한다. 눈총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 12장 11~13절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의 아내 사래에게 말하되 내가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하리라 하니라” 

 

한마디로 나 살자고 아내를 판 것이다. 실제로 누이라고 하니까 애굽 왕이 후궁으로 삼고자 데리고 갔다. 하나님이 급히 개입하지 않았으면 사라의 인생은 비참할 뻔했다. 이 과정에서 사라의 행동이다. 바보처럼 자신을 헌신짝같이 버리는 남편의 말을 순종한다. 그래도 남편 살린다고 아무 말 없이 팔려간다. 한 번 실수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아브라함이 노망이 들었는지 20년이 지난 후 또 이런 일이 일어났다. 100세에 이삭을 낳기 직전 아브라함이 다시 그랄로 내려갔다. 거기서 또 자기 혼자 살자고 추태를 부린다. 

 

창세기 20장 2절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사라의 미모는 나이가 들어도 식을 줄 모른다. 반면에 아브라함의 무책임한 버릇도 고쳐지지 않았다. 나중에 아비멜렉 왕이 다그친다. “왜 그렇게 했느냐?” 11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 비겁한 변명이다. 

 

한 술 더 떠 사라는 남편을 위해 둘째 아내도 보게 한다. 사라는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하갈을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게 한다. 대를 잇기 위해서다. 당시 문화가 아이를 낳지 못하면 대를 잇기 위해 둘째 부인을 두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와 이스라엘 문화가 닮은 점이 많다. 이사 가자면 가고, 자신을 팔면 팔려 가고, 남편 대 잇는다고 둘째 부인도 중매해 주고 참 성격 좋다.

 

그러나 사라도 성질이 있다. 다만 때를 기다릴 뿐이다. 착하다고 무조건 믿고 있다가 나중에 큰코다친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넘었다. 그렇게 원했던 이삭도 태어났다. 그런데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이 자꾸 이삭을 괴롭히고, 또 주제도 모르고 하갈이 사라를 무시한다. 그러자 드디어 사라가 대폭발한다. 창세기 21장 9~10절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좇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둘 다 당장 내 쫓으라. 여기서 아브라함의 태도를 주의 깊게 보라. 11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밤새 근심한다. 고민하더니 14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결국 두 모자를 쫓아낸다. 

 

왜 그랬을까? 이제 아브라함도 힘이 떨어졌다. 사라를 못 이긴다. 100세가 넘었고, 사라의 약점이었던 아들 이삭도 낳았다. 그러니 무슨 수로 사라를 이기나? 사라는 똑똑한 여자다. 그동안 참아 준 것이지 바보가 아니다. 속으로 “그래! 내가 아들만 낳아 봐라!”, “누가 더 오래 사나 보자” 자기 때를 기다린 것이다. 남자의 때가 있고, 여자의 때가 있다. 젊고 힘 있을 때는 남자의 때이지만 힘 떨어지면 그날로 여자의 때다. 사라 같은 아내, 이런 여자가 무서운 것이다. 지금이야 무조건 “네, 네” 하면서 순종하지만 가슴에는 비수를 숨기고 있다. 자기 때를 기다리고 있다. 

 

잠언 5장 15~19절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이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과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연모하라” 

 

힘 있을 때 보험을 들어야 한다. 젊을 때 힘도 조절해야 한다. 가족을 위해 힘쓸 때 써야 나중에 가족한테 버림받지 않는다. 나중에 잘해 보려면 이미 때가 늦다. 이사 가기 전에 잘 해야 이삿짐 하고 같이 갈 수 있다. 부부 사이에도 사랑할 때가 있다. 때를 놓치면 틈이 벌어지고, 수습하려면 그만큼 힘이 든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도 때가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때 마침 어머니 마리아가 서 있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래도 10달 동안 배 아파 낳은 육신의 아들이었다.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이 오죽할까? 그것을 내려다보는 예수의 심정은 또 어떨까? 그 순간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제자 요한에게 중요한 부탁을 한다. 

 

요한복음 19장 25~27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리아의 아내 마리와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되 보라 네 어머니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는 육신적으로는 장남이었다. 장남이 사형 당했으니 가족들도 피해를 입을 것이다. 어머니가 걱정됐다. 그래서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그는 부자였다. 마지막 장남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때가 있다. 살아 있을 때 한 번 더 얼굴 뵙고, 용돈 드리는 것이 백번 낫다. 때를 놓치면 땅을 치고 후회해도 계시지 않는다. 


더 중요한 때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때이다. 사람은 영원히 살지 못한다. 내일은 사람의 시간이 아니다. 누가복음 14장에 어떤 왕이 잔치를 열고, 사람들을 초청했다. 하인들이 초청장을 가지고 사람을 찾아갔다. 어떤 사람은 밭을 샀다며 나가 봐야 한다고 거절했다. 또 어떤 사람은 소 다섯 마리를 샀다며 시험을 해 봐야 한다고 거절했다. 다른 사람은 막 사랑한 사람과 결혼을 했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했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했다. 하인들은 허무하게 돌아왔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은 화가 단단히 났다. 선한 마음으로 초청했는데 냉정하게 거절당한 것이다.

 

그러자 24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천국 문은 지금 열려있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 문은 영원히 열려 있지는 않다. 주님이 오시면 닫힌다. 그때는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다. 기회를 놓친 것이다. 노아의 방주가 문이 닫히자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다 물속에 수장 되었다. 끔찍한 심판이다. 공의로운 심판이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오만하게도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내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으로 당연시한다. 죽음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부자처럼, 부자의 인생이 계속해서 이어질 것 같다. 하지만 부자의 인생도 끝이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마지막 순간이 온다. 그는 죽는 순간, 전혀 다른 세상에 눈을 떴다. 음부의 고통이 시작되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있는 지도 몰랐다.

 

자신의 대문에 앉아 노숙하던 나사로를 보면, 참 어리석다고 비난했는데 그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 나사로는 거지로 살아서 불쌍하여 천국에 간 것이 아니다. 부자는 부자로 살아서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름이다. 거지와 부자는 이름이 있고, 없고다. 거지는 이름이 ‘나사로’다. 자신의 이름이 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이름이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다. 자녀는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으니 천국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부자는 누구 자식인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없다. 하나님 아버지 집에 들어갈 자격이 안 된다. 그는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지는 않았다.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도, 섬기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부를 위해서만 살았다. 

 

사람의 심장이 뛰고 있을 때가 중요하다. 심장이 뛸 때는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 그래야 죽은 후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때를 놓치면 영원한 지옥이다. 심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자는 지옥에서 뼈저리게 후회한다. 하지만 늦었다. 다시는 기회가 없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거대한 장벽이 있다. 여기서 저기로 건널 갈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아직 내 심장이 뛸 때다. 


사랑하는 것도 때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 사이에도 사랑할 때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때가 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지혜다. 사랑할 때 사랑하지 못하면 평생을 후회한다. 나중에 잘 할게, 이 말은 자기 기만이다. 1시간 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오만에서 깨어나야 한다. 사랑하자. 자녀를 사랑하고 부모를 사랑하자.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되 말과 혀로만 하지 말자.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부지런히 사랑하자.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사랑하자. 손 한 번 잡아주고,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먹자. 사랑은 거창하지 않다. 요란하지 않다. 진심이면 된다. 오늘 사랑하자. 사랑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요한일서 4장 7절,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니라.”

사랑도 때가 있다. 때를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총회소개구독안내광고안내고충처리안개인정보취금안내 및 이용약관홈페이지 제작안내공지사항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04649 / 등록일 : 2017년 08월 07일
발행인 : 양재철 목사 / 편집인 : 송시웅 목사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노해로 81길 22-26(상계동) / TEL: 02-782-0933 / Fax: 02-782-3372 / 발행일 2005년 03월 02일
청소년보호 책임자 : 이은정 (02) 720-6839
Copyright ⓒ 2017 기하성총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