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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버릴 것과 취할 것” (베드로전서 2장 1절)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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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버릴 것과 취할 것” (베드로전서 2장 1절)

박용수 목사(대전동지방회장, 참사랑순복음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25-09-30 09:23

본문


박용수 목사.jpg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


성도는, 어느 날 갑자기 신분이 달라진 사람들이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마귀 나라의 백성으로 살다가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국적이 바뀌었다. 갑자기 신분이 변화됐기 때문에 버릴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다. 신분은 변했지만 성품은 아직 그대로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존재다. 이것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한다. 성화는 버릴 것은 버리고 채울 것을 채우는 과정이다.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버려야 할 것들을 알려준다. 


1. 악독 


악하고 독한 마음이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적당히 악하고 독해야 세상을 살아가는데 유리할 수 있었다. 좋게, 신사적으로 말하면 호구로 여기지만 악하고 독하게 말하면 금방 말의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효과도 있지만 부작용도 많다. 우선 상대방보다 내가 더 악하거나 독해야 효과가 있다. 독한 사람 앞에서는 적당히 독기를 부려도 꿈쩍도 않는다. 따라서 악독으로 세상을 살다보면 내가 악하고 독해진다. 그리고 이 악하고 독한 마음은 내 속의 평안을 무너뜨리고, 사랑이 식어지게 만들고, 스스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자신을 악독한 존재라고 여기는데 자존감이 높아질 수가 없다. 

 

성도는 악으로, 깡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사랑으로, 진리로 세상을 사는 법을 배워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화 감동되어서 사랑의 힘, 진리의 능력, 선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이제는 잘못된 삶의 원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더딜지라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 사도 바울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권면한다. 악독은 하나님 나라의 정서가 아닌, 마귀 나라의 정서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특히 내게 손해가 되는 상황이거나 악독으로 다가오는 사람에게라도 성도는 악독을 버리자. 악하고 독한 말로 반응하는 순간부터 마귀 나라로 넘어간다. 그리고 하나님도 내 편이 될 수가 없으시다. 하나님이 악독한 사람 편이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나쁜 상황에서도 선으로, 사랑으로, 진리로 반응하는 법을 배워 나가자.


2. 기만


나의 유익을 위해 상대방을 속이거나 이용하려는 마음이다.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저지르는 부정직이 아니라 의도적인 부정직이다. 목적을 가지고 거짓을 행하는 것이 기만이다. 한동안 기획부동산이 사회적인 문제가 됐었다. 가치가 없는 땅들을, 사두면 금싸라기가 될 것처럼 현혹해서 팔아서 이득을 취했다. 그렇게 속아서 산 땅들이 지금도 팔지도 못하고, 쓸 수도 없이 세금만 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순진한 사람들을 기만하는 기만 부동산이다. 

 

상대방을 속여서 얻은 유익이 나에게 복이 될까? 어리석은 자는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잠 9:17)고 한다. 하나님 나라의 법칙은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갈 6:7)이다. 악의 씨앗을 뿌리면 악의 열매를 거둔다. 사람은 이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자체로 존귀하다.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용하여 유익을 얻어내는 존재가 아니다. 사랑하면, 존귀하기에 잘 섬기면 나에게 유익이 돌아온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 자녀의 삶이다.


3. 외식


“외식”이라는 단어는 한자로 ‘바깥 외’, ‘장식할 식’자이다. 바깥을 장식한다. 즉 속은 어떠하든지 놔두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바깥만 장식한다는 의미로 주로 겉과 속이 다를 때 쓰인다. 복음서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예수님이 주로 많이 사용하셨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겉보기에는 경건한 종교인들이어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종교적인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채소의 일종)도 수확하면 십일조를 구별했고 정기적으로 금식하고 회당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라고 책망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겉과 속이 다름을 알고 계셨다. 겉은 경건해 보이는데 속은 회를 칠한 무덤 같았다. 즉 그들의 외식이 사람들에게는 통했는데 예수님께는 속이 들통 난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마음과 생각을 살피시는 분이시다.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슥 12:1) 하나님이시다. 마음을 지으신 이가 마음과 생각도 살피지 않겠는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인생을 살다 보니 외모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마음에서 나온다. 마음의 색깔이 삶의 색깔이 된다. 

 

신앙은 자칫 외식하기 쉽다. 지도자일수록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눈에 안보이고, 사람들은 늘 나의 앞뒤 좌우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식되면 보이는 외형을 치장하게 되고, 하나님이 의식되면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을 치장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러 갈 때는 거울을 보고, 하나님께 엎드리면 마음에 숨겨진 악한 생각, 동기 등이 찔려서 결국 고백하게 되고 돌이켜 마음을 새롭게 단장한다. 외식적인 신앙은 피곤하다. 그리고 그것이 습관이 되면 위험하다.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자. 


4. 시기심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남이 가졌을 때 생겨나는 마음이다. 질투가 나의 결핍에 집중한다면 시기는 상대방이 가진 것에 집중한다. 그래서 질투는 자학이나 열등감이 생겨나서 나를 깎아내리는 행동을 하게 되지만, 시기는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를 비방이라고 한다. 시기와 비방은 원인과 결과이다. 잠언에 ‘분은 잔인하고 노는 홍수 같거니와 시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4)라고 한다. 시기심이 모든 것을 쓸고 가는 홍수 같은 분노보다 더 무섭다는 것이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시기심은 사울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고 결국 사울이 광인이 되어 폐인이 되게 했다. 시기심의 부작용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시기의 근본 원인은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라고 한다. 내가 만족스러우면 다른 사람이 가진 것, 이룬 것에 시기심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시기심을 극복하는 방법은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면 된다. 내가 만족스러운데 굳이 누구를 시기할 마음이 들겠는가. 사람의 욕구의 근본은 사랑이다.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은 마음... 이것이 채워지면 세상의 여러 욕심에서 자유해진다. 이것이 안 되니까 돈, 명예, 권력, 쾌락 등으로 채우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곳은 교회와 가정이다.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과의 분리가 모든 결핍의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해결책도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하나님과 연합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공급된다.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파이프 라인이 연결된 사람들이다. 그러나 밸브를 여는 것은 나의 몫이다. 예배, 기도, 찬양, 성경 읽기 등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좋은 방법들이다. 하나님의 사랑, 인정, 존중이 마음의 항아리에 채워지면 시기심도 극복된다. 또한 가정이 사람의 근본 욕구를 채우는 역할을 한다. 부모와 형제의 사랑, 그 속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오뚜기의 엉덩이에 붙어있는 납덩어리처럼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무게중심이 되어준다. 건강한 신앙과 가정이 인생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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