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ght_maket_banner.png
순복음홍성교회 라동옥 목사가 직접 농사지은 벌꿀판매
이태근 목사와 함께하는 아침묵상
본교단 업무협약 업체 / 기하성회원 특별우대
홍영건장로
하나로의료재단
종교인과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요 9:1~7) > 설교

본문 바로가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요 9:1~7) > 설교




최근에 많이본뉴스
오피니언
특별기고란
목자의 뜰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요 9:1~7)

김수동 목사(충북지방회장, 순복음화목한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20-10-13 12:02

본문

김수동 목사.jpg

물이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가는 법은 없습니다. 낮은 데로 흐르다가 마침내 가장 낮은 곳에서 합쳐지게 됩니다. 가장 낮은 곳이란 다르게 표현하면 비어 있는 곳을 말합니다. 비어 있는 곳이기에 사방에서 흘러 내려온 물이 그곳에서 합류하게 되고, 그곳에서 호수나 바다가 시작됩니다. 물은 인간의 목숨을 유지시켜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더러워짐으로 인간의 모든 추함을 깨끗이 씻어 주기에 생명과 사랑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이 이처럼 낮은 데만 찾아서 흘러가듯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사랑의 결정체인 진리 또한 낮고 비어 있는 곳으로 흘러가서 고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제일의 덕목은 언제나 겸손인 것입니다. 왜 겸손한 마음만이 진리를 볼 수 있을까요? 겸손이란 단어 타페이노스(tapinos)는 문자 그대로 ‘저지’ ‘공지’를 뜻합니다. 달리 말해 겸손이란 낮은 곳, 비어 있는 곳을 의미하며 그 겸손한 마음속에서만 진리가 담길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29장 19절에서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한다”고 말씀합니다. 겸손한 자의 그 낮고 비어있는 마음에는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진리의 생명과 기쁨과 사랑이 흘러내리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공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위에도 아래에도 어디를 가도 공기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풍성한 공기 속에 있다 할지라도 사람이 만일 그 공기를 호흡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곧 죽어 버리고 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공기와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을 가리켜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과거형으로 말씀치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거나 혹은 있어왔다는 식의 완료형으로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모세가 호렙산에서 주님을 보았을 때 주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주님께서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 그때도 똑같이 현재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나온 우리 삶의 길목마다 현재형으로 나와 함께 하셨고, 미래에도 영원토록 ‘I am’ 현재형으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주님께서 영원한 현재형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분을 뵙고 좇으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영적 죽음이란 주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누가 그분을 뵙고 따를 수 있을까요? 시편 116편 6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시나니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다윗이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낮은 마음을 가졌을 때, 마음이 한없이 낮아졌을 때, 언제나 현재형으로 자신과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분과의 사귐을 심화시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가장 낮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길에서 구걸하고 있는 소경을 만나셨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9장 6~7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주님께서는 침에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른 다음,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소경이 그 말씀에 순종한 결과, 밝은 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실로암으로 가기 전에는 소경이었기에 주님께서 현재형으로 자신과 함께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로암 못으로 가 눈을 씻은 다음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밝은 눈으로 지금 자신과 함께 계신 주님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사건입니까? 

 

예루살렘 동문 밖 기드론 골짜기에는 기혼이란 샘이 있었습니다. 이곳으로부터 수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물이 마지막으로 고이는 곳이 바로 실로암 못이었습니다. 물은 절대로 높은 곳에 고이는 법이 없습니다. 흘러내리는 물은 반드시 낮은 곳에 고이기 마련입니다. 실로암 못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눈을 씻는다는 것은, 가장 낮은 곳에 무릎을 꿇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소경에게 ‘실로암으로 가라’ 하신 것은 단순히 샘으로 가라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 가장 낮은 곳에 거하라, 가장 낮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라’는 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소경이 주님의 그 명령을 따라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서, 가장 낮은 마음으로 무릎 꿇었을 때, 그 즉시 밝은 눈으로 지금 자신과 함께하고 계시는 주님을 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왜? 실로암의 사람들, 낮은 마음의 소유자만 주님을 뵐 수 있는 밝은 눈을 갖게 됩니까? 주님께서 바로 낮은 곳에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에도 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이야말로 가장 낮은 마음의 소유자이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력이 설령 2.0이라 할지라도, 높은 마음으로는 결코 그분을 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낮은 마음을 갖기만 하면 설령 소경이라 할지라도 밝은 눈으로 그분을 똑바로 뵐 수 있고, 사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로암으로 내려간다는 것, 낮음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 말씀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가 실로암으로 내려가 낮고 낮은 마음, 남을 섬기고, 위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마음의 눈으로, 이 땅에 우리를 섬기러 오신 주님을 밝히 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극히 작은 자를 섬겨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주위에서 가장 볼품없는 자, 가장 미약한 자, 가장 불쌍한 자, 가장 시시한 자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통해 수직적인 삶과 수평적인 삶이 교차하는 십자가의 삶이 성취되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언제 어디서나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높을수록 낮은 자를 섬겨야 합니다. 강할수록 약한 자를 섬겨야 합니다. 나의 모든 소유는, 물질과 인격 혹은 지식을 망라하여 하나님께서 내려 주신 하나님의 도구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채 길바닥에 쓰러져 죽기 일보 직전의 위급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가며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자신이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인간으로 취급조차 않는 사마리아인은 그를 목격하는 즉시 그의 상처를 싸매주었을 뿐만 아니라 주막으로 데리고 가 간호해 주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강도 만난 자를 자신이 섬겨야 할 가장 작은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사마리아인처럼 가장 작은 자를 찾아 자비를 베풀고 섬기라’고 명령 하셨습니다. 은혜로운 것은 이처럼 가장 작은 자를 섬기는 자가 있는 곳에 반드시 오병이어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의 오병이어의 현장에 운집해 있던 1만 명이 넘는 무리 중에 오직 어린아이 한 명만 먹을 것을 지참하고 있었고 그 어린아이는 자신만을 위한 오병이어를 그곳에 있는 모든 자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 어린아이를 위한 한 끼분의 음식은 비록 미미한 분량이었을망정 그 아이가 먹을 것이 없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오병이어를 기꺼이 내어놓았을 때 바로 그 아이가 그 현장에서 가장 강한 자요 가장 큰 자입니다. 다들 빈털터리인데 반해 그 아이만 먹을 것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만을 위한 오병이어를 그곳에 있는 모든 자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한 끼분의 자기 생명을 포기하면서까지 작은 자를 섬기려 했던 그 마음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이었기에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역사하셔서 대군중이 배불리 먹었을 뿐만 아니라 남은 음식이 열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것은 주님의 능력 안에서 오병이어의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우리 모두 섬김을 받으려는 자리에서 내려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삶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낮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었을 때 그곳에 임재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코로나19의 악한 병마와 환경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총회소개구독안내광고안내고충처리안개인정보취금안내 및 이용약관홈페이지 제작안내공지사항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04649 / 등록일 : 2017년 08월 07일
발행인 : 양재철 목사 / 편집인 : 송시웅 목사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노해로 81길 22-26(상계동) / TEL: 02-782-0933 / Fax: 02-782-3372 / 발행일 2005년 03월 02일
청소년보호 책임자 : 이은정 (02) 720-6839
Copyright ⓒ 2017 기하성총회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