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예수님, 그 아래의 사람들
고난주간 금요일 행적 / 수난의 날 (히 2:9) / 엄기호 목사(증경총회장, 성령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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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2-04-15 14:30본문
예수님의 수난을 돌아보게 되는 날에는, 당시의 사람들을 성령 안에서 묵상해보길 원합니다.
1.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때’는 없다. (눅 23:40-43)
‘한 강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욕하던 한 강도 옆에서, 자신도 형 집행을 받는 중에 회개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강도의 회개는, 너무 늦은 것입니까? 죽음 직전에 회개한다는 것은 너무 뻔뻔스러워서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까? 하지만 이 강도의 회심은, 전 인류에게 용서와 구원의 사례를 제시해주는 주요 사건이 됩니다. 죄를 회개하는데, ‘너무 늦은 때’란 없는 것입니다. 지상에서의 호흡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도,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그 사람은 기꺼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한 강도의 구원은 복음의 은혜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케이스입니다. 인간 생각에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되는 그때도 용서의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전도하다가, 죄지었다고 교회에 못 오는 사람을 만나거든, 회개하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 꼭 말해줘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은혜에 의지해서, 회개함으로 용서의 은혜를 누리고, 복음을 널리 전합시다(사 55:7).
2. 십자가 위 예수님께 얻어야 할 것은, 옷처럼 하찮은 것이 아니다. (요 19:23-24)
‘로마 군병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관습이 죄수의 옷을 사형집행인들이 나누었고 물품이 아무리 귀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바로 그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것은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는, 고작해야 겉옷, 속옷을 나눠 가지고 좋아한다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인류의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까이에서도 못 알아보고, 그분을 처형한 후 옷을 나눠 가지는 것에 그치고 말았으니,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옷을 얻은 대신, 영원한 생명 얻을 기회를 잃고 만 것입니다. 우리도 십자가 아래서 탐욕에 빠져 쓸데없는 것만 구한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자기 욕심대로 구한 것을 예수님이 주지 않으시면, 또다시 얼마든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 구해야 할 것은, 약간의 돈이나 약간의 위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요 4:10)
3. 고통당하는 자들의 위로자가 되려면 고난을 피하지 말고 이겨내라. (마 27:34)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로마 군병이 주는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거부하셨을까요? 쓸개 탄 포도주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고통을 덜 느낌으로 몸부림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마취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고통을 몸소 다 감당하심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궁극적 목적인 ‘대속의 고난’의 값을 온전히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겪을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몸소 체험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영원한 구주와 진정한 중보자로서,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와 도움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후 1:4).
몸이든, 마음이든, 아파 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의 고통과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경험이 많아야 더 많이 쓰임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피하지 않고 몸소 겪어낸 고난 극복의 경험들이, 누군가에게는 유익한 위로가 되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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