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역사의 산증인 최요열 원로목사 하나님의 부름을 받다
목회와 선교 위해 살다간 하나님의 사람 … “세상 집착 버리고 하늘에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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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자 작성일17-08-30 14:48본문
초기 순복음신앙에 대한 몰이해로 한국교회 강단에서 배척을 받았지만 굴하지 않고, 척박한 땅에 오순절 성령의 능력으로 순복음의 꽃씨를 뿌렸다.
최 목사는 평생 하나님나라 확장에 힘썼다. 후학들을 양성한 신학자요, 기력이 다해 쓰러지는 그 날까지 강단에 선 설교자요, 마지막까지 중국 선교에 열정을 쏟은 선교사였다.
순복음교회 1세대 목회자로서 영예보다 소박한 목사의 삶을 선택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그날까지 오직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가셨다.
故 최요열 원로목사는 1930년 5월 6일 함평군 대동면 용성리 55번지에서 출생했다. 예수를 영접하고 목사의 길로 접어든 것은 가정의 신앙적 배경이 있었다. 최 목사의 외가는 초창기 장로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할아버지 서경구는 서상윤 장로와 더불어 최초의 권사로서 성경 파는 일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또한 외할아버지뻘 되시는 서상조 목사는 서경조 목사와 함께 새문안교회를 세운 분이다. 외삼촌 서성일 목사는 평양신학교 20회 졸업생으로 방지일 목사의 동기다. 친할아버지는 전라도 함평에 용성교회를 세웠다.
이런 신앙적 배경에 속에서 성장한 최 목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박성산 목사가 순복음신학교를 설립하자 부흥사로 사역하던 형님 최요한 목사의 권유로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신학교 생활은 열악했다. 인가가 나지 않은 관계로 오전에는 순복음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오후에는 일, 저녁에는 종로3가까지 걸어서 인가 난 중앙신학교(현재 강남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했다. 신학교 1학년 2학기 때에는 이태원에서 가정예배를 시작했으며, 1955년 3월 10일 기하성총회 이태원교회 1호 전도사로 임명되었다.
이어 1960년 6월 29일 허홍 목사가 시무한 서울교회 전도사 역임, 1960년 9월 27일 대전 선화동교회와 가장동교회에서 사역했다. 1962년 8월 23일 목사 안수를 받은 후 1965년 12월 5일 순복음새소망교회에 부임해 평생을 사역했다.
순복음새소망교회는 1961년 3월 15일 미국 잭홈 선교사에 의해 ‘새소망소년의집’으로 개원되었다. 1962년에는 정두영 목사가 원목으로 부임해 16평 군용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이후 최 목사가 부임하면서 교회의 기초석을 단단하게 쌓기 시작했다.
진흙 벽돌을 찍어 손수 교회를 건축했으며, 2000년 6월 4일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생명을 다해 목회했다. 목사안수 받은 그날부터 성역 55년, 오직 한 길 목사의 삶을 살았다. 다른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목사의 초심을 잃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故 최요열 목사는 기하성교단의 큰 스승이었다.
1956년 교단 초기에는 총회 재무와 회계를 역임하면서 교단의 기초를 닦는데 힘썼다. 1974년에는 교단헌법위원, 고시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서울남지방회, 경기지방회, 경기서지방회 회장을 역임했다.
무엇보다 최 목사는 기하성교단의 미래와 한국교회 복음을 위해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력했다. 1960년에는 한국성서신학교 설립멤버 교수로 7년을 사역했으며, 1961년에는 대전 중도성서신학교 전임강사로 4년을 사역했다.
1973년부터는 대조동 순복음신학교 교수로서 본격적으로 기하성교단 신학과 신앙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82년부터 1994년까지는 한세대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했다.
은퇴 후에도 가르치는 사역은 쉬지 않았다. 이번에는 국내 신학교가 아닌 중국으로 신학 강단을 넓혔다. 중국 현장에서 사역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한 번 강의를 시작하면 1주일 동안 내내 진행됐다.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최 목사는 열정적인 교수였다. 온 몸으로 복음을 가르쳤다. 가르치면서 새 힘을 얻고, 가르치면서 자신이 살았다. 호흡이 있는 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사가 사는 길임을 일깨웠다.
그렇게 50년 동안 강단에서 복음의 씨를 뿌렸기에 오늘 1만여 명의 제자들이 전 세계에 흩어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故 최요열 목사의 마지막은 선교였다.
2000년 6월 순복음새소망교회에서 은퇴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선교사역에 열정을 쏟았다. 평생 목회한 경륜과 노하우, 신학교 강단에서 쌓은 신학지식들을 전하기 위해 밤낮으로 세계 선교현장을 다녔다.
일본 15회, 대만 7회, 미국, 캐나다 7회, 러시아 4회, 케냐 2회, 필리핀 3회, 싱가폴, 인도 1회, 이스라엘 1회 등 전세계 선교현장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특히 중국에는 54회에 거쳐 복음을 전했다. 중국 23성과 5개 자치구, 6개 특별 행정시를 기차와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복음을 강론했다.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그 복음의 거리만 해도 42만km이다.
지난해 12월 쓰러지기 전까지도 중국 선교를 했다. 겨우 회복되어 몸을 추스르자 다시 선교를 하다 3주전에 다시 쓰러졌다. 87세 고령임에도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 선교현장에서 기다리는 현지인들과 제자들을 먼저 생각했다.
은퇴 후에도 매월 셋째 주는 주일 강단에서 설교했다. 마지막 하나님이 부르신 그날까지 최 목사는 선교사요, 설교자였다.
그는 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 20)를 강조했다.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항상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다는 심정으로 오늘을 살 것을 권면했다. 마라나타 신앙을 가지고 복음의 삶을 살다 가야 한다.
그 말씀처럼 최 목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의 복음을 위해 살았다.
소박한 목회자 故 최요열 목사
그의 삶은 정치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소박하고 검소했다. 은퇴 후에는 연립주택에 거주하며 복음을 전하는데 모든 것을 투자했다. 무슨 물건이든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치적 욕심이 없었다. 목사로 부름 받았으니 목사로 살다 가셨다.
심지어 손주들에게도 평생 세배를 받지 않았다. 오직 경배는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이다.
최 목사의 후손들도 그 발자취를 따라 목사의 길을 걷고 있다. 사위 이봉식 목사는 순복음새소망교회 담임목사로 믿음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아들 최수웅 목사는 미국에서 목회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또 사위 임태순 선교사는 35년 동안 케냐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유가족들은 “아버님 최요열 원로목사님의 가르침을 본받아 항상 믿음 위에 견고하게 서서 주의 일과 영혼구원을 위해 힘쓰는 유가족이 되겠다”고 마음을 전했다.
2013년 6월 <교단 창립 60주년 기념 대조동신학교 제1회 졸업생 최요열 원로목사에게 듣는다> 총회신문 인터뷰에서 최 목사는 교단과 후배들에게 성령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진할 것을 당부했다.
“교단 통합이 완성되어야 하고, 여기에 더해 교단 산하의 신학교와 신학생들이 성령의 불을 가지고 나아가 개척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에 부흥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성령의 불길이 다시 한 번 뜨겁게 타올라야 합니다. 총회는 더 이상 다툼의 장이 아니라 성령운동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순복음의 신앙을 전하다 불꽃처럼 살다간 고 최요열 목사의 외침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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