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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혔던 순교역사 재조명 … 믿음의 유산으로 이어갈 것” > 특집ㆍ기획ㆍ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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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혔던 순교역사 재조명 … 믿음의 유산으로 이어갈 것” > 특집ㆍ기획ㆍ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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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묻혔던 순교역사 재조명 … 믿음의 유산으로 이어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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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자 작성일17-09-0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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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근 장로.jpg

1950년 9월 17일, 이 날은 한국 오순절 교회 역사에 첫 순교의 피를 흘린 날이다.


순천 순복음오순절교회 초대 교역자로 사역한 고 박헌근 장로(사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양을 돌보다 공산군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순복음오순절교회는 호남지역 성령운동의 본산지로 복음을 증거했으며, 1950년 순천에서 열린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를 계기로 1953년 4월 8일 서울남부교회에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창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50년사(역사편) 302쪽에는 ‘1회, 2회, 3회를 거쳐 4회까지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가 바로 1953년 4월 8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조직과 모체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 오순절교회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그의 삶과 신앙은 특별히 조명 받지 못했다. 10년 전부터 순복음오순절교회가 순교의 신앙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박헌근장로순교사업회>를 설립해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다. 또 박헌근 장로의 신앙 영향을 받은 제자들 중 수원 좁은길교회 박종수 원로목사가 <사단법인박헌근장로순교기념사업회>를 설립해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늦었지만 교단 차원에서 순교 역사를 재확인하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전라지방회, 전라1지방회와 함께 ‘박헌근 장로 순교67주년 기념예배 및 음악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본지는 박 장로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며, 그의 순교 신앙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박헌근 장로는 1914년 9월 3일 무안군 몽탄면 봉산리 567번지에서 박민상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 치하에서 어렵게 살다가 10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 거주했다. 그 무렵 예수를 영접하고 고등학교 졸업한 후 인쇄회사에 취직했다. 직장생활 중에서 소명을 받아 오사카 이꼬마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42년 귀국한 박 장로는 대전 중동에 위치한 제일장로교회에서 집사로, 면류청년회 회장과 주일학교 교사로 아동을 가르쳤다. 그 후 신앙의 뜻을 같이하는 성도들과 대전 삼성교회를 창립하고, 장로로 피택되었다. 또한 대전 애육원 주일학교 교장으로 섬겼다.


1948년 3월 15일 박귀임 전도사는 ‘대한기독교 순천오순절교회’(현재‘순복음오순절교회’의 전신)를 설립하고 첫 예배를 드렸다. 이후 교회가 성장해 가자 박헌근 장로를 초대 교역자로 청빙했다.


박 장로는 1948년 11월에 부임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1년 만에 35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부흥했다. 교회가 부흥되자 일제의 핍박과 전쟁으로 흩어졌던 오순절교회들이 재건을 꿈꾸며 한자리에 모였다.


1950년 4월 9일 순복음오순절교회에서 ‘제1회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가 열렸다.
허홍 목사, 박성산 목사, 김성환 목사, 윤성덕 목사, 박귀임 전도사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200여 성도들이 모여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 부흥회를 개최했다.

  
제 1 대회.jpg오순절대회 설교는 박헌근 장로가 맡았다. 성령의 불이 다시 타오르자 전쟁 중에도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했다.
1952년 5월 4일‘제2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 10월 5일 ‘제3회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가 순복음오순절교회에서 열렸다.     


순복음오순절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땅에 초대교회 오순절 신앙운동을 펼치는 성도들이 있다는 소식이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전달되었다.


1952년 최초의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로 체스넛 목사가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 용산 남부교회에서 역사적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창립됐다.


순복음오순절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은 한국 오순절 성령운동의 불씨가 되었으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창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 전쟁은 그의 일생을 바꿔 놓았다.
6·25 전쟁으로 공산군이 순천으로 밀려오자 사람들이 피난 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양들을 사지에 버려두고 혼자만 살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늘 하던대로 비밀리에 교우들을 심방하던 중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은 금식하면서 사식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전도를 쉬지 않았다.


1950년 9월 17일, 이 날은 한국 오순절 제단에 순교의 피를 바친 날이다. 공산군은 퇴각하면서 박 장로를 무참히 난사했다. 최예임 사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웃음 띈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이 전파된 지 22년 만에 박 장로는 첫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때 나이 36세였다.


박 장로는 2001년 8월 한국교회 순교자 기념사업회 순교자로 등록되었으며, 2002년 3월 14일에는 순교기념비가 한국교회 순교자 기념관 입구에 세워졌다.


역사편에 보면 ‘6·25 전쟁으로 인해 대한기독교오순절교회 또한 피해가 컸다. 이때 순천 오순절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면서 제1회 대한기독교오순절교회 대회 때 성회를 인도했던 박헌근 장로를 잃은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우들은 이미 박헌근 장로가 순교할 것을 알 수 있었다. 순천교회가 바로 순천경찰서 북쪽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박헌근 장로가 고문당하며 부르짖는 비명과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 오순절신앙이 전교(傳敎)된 지 22년이 되는 1950년 9월말, 한국 오순절교회는 최초의 순교자를 낸 것이다 ’고 기록하고 있다. 


박성산 목사는 박헌근 장로의 순교소식을 미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손종영 목사에게 전했다. 손 목사는 이 소식을 미 하나님의성회 주간지 1951년 10월 28일자 기사에 소개했다.


‘공산당이 순천에서 철수하면서 100명이 넘는 민주인사들(이들 중 2명은 기독교 지도자)에게 총격을 가했습니다. 공산당이 총격을 가하려 하자 박헌근 장로는 공산당의 책상을 치면서 “당신들 모두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오”라고 담대하게 말하면서 앞으로 달려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첫 총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순교였습니다.’라고 기록했다.


한국기독교순교유족회가 작성한 순교자유족카드에 따르면, 박 장로가 순교하면서 4, 5년 후에 최예임 사모는 병환으로 소천했다. 남은 유족들은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박 장로가 순교하기 전 순천 오순절교회에서 말씀을 들었던 성도들 가운데 박종수 목사는 순복음신학교 부학장을 역임했다.


박종수 목사는 박 장로의 설교 중 “송사리는 아주 작은 물고기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과 같이 우리 성도들 속에도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힘이 있어서 죄악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이기며 나가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순교한 고귀한 정신이 생애에 깊은 감화를 끼쳐서 좁은길교회 목사로 헌신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순천오순절교회 정문균 장로는 1965년부터 교회에 출석했지만 박헌근 장로의 순교 역사는 몰랐다.
그러다 10년 전 우연한 기회에 박헌근 장로의 순교역사를 알았다. 충격을 받았다. 이 소중한 믿음의 역사가 그동안 묻혀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그 길로 사료를 수집하고, 박헌근 장로의 제자들을 만나 그의 생애를 들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순교한 날에 무안군 몽탄면 순교자 묘역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박헌근장로순교기념사업회>를 조직해 순교신앙을 재조명하며, 뜻을 이어가고 있다.


박헌근장로기념.jpg


36세, 오순절 신앙의 첫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박헌근 장로의 삶과 신앙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피가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씨앗이 되었다. 다음세대에 순교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순복음의 신앙과 삶을 새롭게 회복해야 할 것이다.           

 

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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