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로 산다는 자체가 기쁨이요, 주님만 생각해도 감사해요”
목회 47년 외길 걸어온 산지교회 김남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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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7-09-05 10:42본문
산지교회 김남순 목사는 시(詩)처럼 살았다. 처음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오로지 그 길을 따랐다. 후회도 없다. 더 깊은 사랑을 노래하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다.
김 목사는 1970년 대조동신학교에 입학해 72년 12월에 졸업했다. 순복음신학교 18회 졸업생이다. 그때부터 목회사역을 감당해 올해로 47년째이다. 목사 안수는 교단의 헌법을 모든 충족시킨 후 1996년에 받았다. 여성목회자로서 교단적으로 두 번째이다.
당시에는 만 45세, 목회 연한 15년, 개척한지 7년이 되어야 여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었다. 목사 안수를 일찍 받기 위해 교단을 떠나지도, 다른 방법을 강구하지도 않았다. 순복음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순복음 신학을 공부하고, 순복음교회에서 사역했으니 순복음의 헌법을 따랐다.
1987년 7월 12일, 금천구 시흥동에서 교회를 개척하고는 그 자리에서 15년을 목회했다. 2002년 광명시 소하동으로 교회를 이전하고는 지금까지 목회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평생 여자 목사로 목회한다는 것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환경이 요동치고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때로는 죽을 만큼 곤고한 시간도 있었다. 위기의 순간을 피해보려고 잔꾀(?)를 내 볼까?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 주님을 만나고 고백했던 사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
“목회는 내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부르심을 끝까지 쫓아가는 것으로 나는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대단한 목회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늘 내 자리를 지키고, 내게 맡긴 소임을 생명 다해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으로 족하다고 하셨습니다.”
김 목사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예수를 믿었다. 남원에 살 때 어머니가 먼저 예수를 믿었다. 시골에 교회가 없으니 섬진강을 건너 먼 거리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업고 강을 건너 교회를 다니면서 마을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기도했다. 하나님은 어머니의 기도를 들으시고 남원 금지면에 금지순복음교회를 세워 주셨다. 어머니는 교회의 첫 번째 집사였다. 어머니는 믿음의 좋은 교사요, 든든한 후원자였다. 1965년 중학교 1학년 겨울 방학 때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내 일생을 보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나 선명하고 가슴이 뜨거웠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오로지 주의 복음을 위해 살리라. 그날 이후 새벽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새벽예배는 평생의 기쁨이요, 찬송이 되었다.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새벽예배를 통해 첫 사랑, 첫 사명을 간직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그날 주신 사명을 일깨웠다. 기도를 하는데 자꾸만 신학교로 가라고 했다. 어머니에게 말했더니 “그 길을 가야 한다.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용기를 주었다.
1970년 3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여고생이 대조동 신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이야 흔한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희귀할(?) 때였다. 1970년 12월에 졸업을 하고, 남원순복음교회에서 전도사 사역을 감당했다. 고향이 남원이라 여기서 평생 전도사로 헌신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다시 사명을 일깨웠다. 교회를 개척하라는 것이었다. 여자 전도사가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개척 멤버도, 수중에 돈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막막했다. 3주간 금식기도 하는 중에 ‘산지교회’라는 이름을 주었다. 우연히 남원순복음교회에서 신앙하던 집사가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자신의 옆에 교회를 개척하라고 했다. 이 말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았다. 마침 시흥동에서 목회하던 교회가 이전한다며 이 자리에서 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순조롭게 예비해 주신 것이다. 1987년 시흥동 은행나무 있는 곳에 산지교회를 개척했다.
현실목회는 녹록치 않았다. 사람들은 모였다 흩어졌다. 성장하는가 하면 또 다시 원점이었다. 어느 수요일은 강단에서 숫자를 세는데 아무도 없었다. 마음이 너무 낙담해 하나님께 사표를 내겠다며 울었다.
“가슴 아파도 참고 견뎌야지.”
그날 수요예배에 빠진 청년은 목사가 되었다.
또 어느 해에는 개척멤버가 단 한명도 남지 않고 떠난 적이 있었다. 때마침 다리 골절상을 당한 때라 교회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다. 오직 기도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기도하는데 마음이 평안했다. 하나님은 팔순이 넘은 노 권사님을 한 분 보내주셨다. 그 분이 교회의 모든 필요를 채우셨다. 그리고 신학교 강단에서 강의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셨다.
가장 힘든 시기에 가장 큰 사랑과 은혜, 복음의 사명을 경험하게 하셨다.
“그때 깨달았어요, 연단을 통해 내 안의 악함과 약함이 드러나고, 비로소 내려놓음을 배웠어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목회는 하나님 목회입니다. 그날 이후 사람을 보지 않고 목회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원칙을 정했다. 교회 재정의 10%는 무조건 선교비로 드린다. 많든 적든 있는 그대로 하나님 나라 확정을 위해 사용한다. 개척교회 형편도 어려운데 그 약속을 지켰다. 하나님은 그 마음과 헌신을 보시고 일용할 양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교회 성도 숫자와 상관없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셨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가정적으로 매이는 것이 없었다. 자유롭게 100%를 헌신할 수 있었다.
1982년부터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여름성경학교 찬송시를 17년 동안 120곡을 작사했다. 조선문학에 등단해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크게 교회가 성장하지 않았지만 목회는 행복했다. 목사로 산다는 자체가 기쁨이요, 주님만 생각해도 감사하다.
김 목사의 마지막 소원은 진정한 헌신자가 되는 것이다. 가식으로 꾸미지 않고, 거짓으로 드리지 않고 온전하게, 처음마음 끝까지 헌신자로 살다 가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사명을 받고, 일생 결혼하지 않고 47년을 목회했다. 김 목사는 한 평생 목사로 살아온 세월이 후회 없다고 말한다. 사람을 기대하면 실망하고 상처 받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그것으로 족한다는 것이다.
일생을 순복음 신앙으로 살아온 그의 삶이 고결하고 아름답다.
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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