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오순절신앙과 순교역사 계승해 새로운 부흥운동 일으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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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7-08-30 13:46본문
■기하성총회 교회의 역사를 찾아가다 / 순천 순복음오순절교회 (김상백 목사)
순복음오순절교회 호남지역 성령운동의 본산지, 어머니같은 교회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 계기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 돼
순복음오순절교회는 한국 오순절교회사에 있어 중요한 교회이다.
호남지역에 성령의 바람을 일으킨 성령운동의 본산지가 되는 교회이며,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를 불씨로 1953년 4월 8일 서울 남부교회에서 열린 역사적인‘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창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48년 3월 15일 ‘대한기독교순천오순절교회’로 개척된 이래, 올해로 68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며, 초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초석이 되었던 곽봉조 목사(2대, 7대), 배부근 목사(4대), 허홍 목사(10대)가 시무했다.
특히 초대 교역자였던 박헌근 장로는 1950년 9월 17일 한국 땅에 오순절 신앙이 전파된 지 22년 만에 처음이자 유일한 순교의 피를 흘렸다.
박귀임 전도사 복음의 씨를 뿌리다
순복음오순절교회는 일본 이코마신학교 제1회 졸업생인 곽봉조 목사로 시작된다. 일본 오사카 조선오순절교회에서 곽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은 박자신이 고국에 있는 시어머니 이복덕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했다. 이복덕은 표씨 부인에게 은혜를 끼쳤고, 표씨 부인은 자신의 집에서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가정예배를 드렸다.
1947년 박귀임이 예배에 참석했다가 강력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 뜨거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박귀임은 순천 철도국에 근무하는 남동생 박용덕의 집에 가정집회소를 마련, 1948년 3월 15일 첫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오늘날 ‘순복음오순절교회’의 전신인 ‘대한기독교 순천오순절교회’이다.
박귀임 전도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열정적으로 전도, 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했다. 8개월 후에는 초대 교역자로 박헌근 장로를 청빙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952년 광주 불로동 오순절교회(현 광주순복음교회), 1954년에는 광주 계림교회(현 대광교회), 1962년 광주 하나님의성회 덕림교회(현 순복음광주중앙교회)를 설립하는 등 호남에 오순절 신앙의 씨뿌리기 사역을 감당했다.
박헌근 장로, 오순절 신앙 첫 순교의 제물이 되다
박귀임 전도사가 뿌린 씨앗에 물을 주고 자라게 한 것은 박헌근 장로다.
박 장로는 10세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예수를 영접, 이코마성서신학원을 졸업했다. 1942년 귀국한 그는 대전 제일장로교회 유년주일학교 부장과 청년회 회장으로 봉사했으며, 그 후 신앙의 뜻을 같이하는 성도들과 대전 삼성교회를 창립, 장로로 피택되었다. 순복음오순절교회에서 청빙하자 1948년 11월 초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1950년 4월 9일 순복음오순절교회에서 ‘제1회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가 열렸다. 허홍 목사, 박성산 목사, 김성환 목사, 윤성덕 목사, 박귀임 전도사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200여 성도들이 모여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부흥회를 개최했다. 오순절대회 설교는 박헌근 장로가 맡았다. 성령의 불이 다시 타오르자 전쟁 중에도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했다. 1952년 5월 4일‘제2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 10월 5일 ‘제3회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가 순복음오순절교회에서 열렸다.
순복음오순절교회를 중심으로 한국 땅에 초대교회 오순절 신앙운동을 펼치는 성도들이 있다는 소식이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전달되었다. 1952년 한국 최초의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로 체스넛 목사가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고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 용산 남부교회에서 역사적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창립됐다.
순복음오순절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운동은 한국 오순절 성령운동의 불씨가 되었으며,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는 양들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목자였다. 6·25 전쟁으로 공산군이 순천으로 밀려오자 사람들이 피난갈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그는 양들을 사지에 버려두고 혼자만 살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늘 하던대로 성도들을 심방하던 중 공산군에 체포되었다. 유치장에 감금되어 심한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는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은 금식하면서 사식을 동료들에게 나눠주고, 고문을 받으면서도 전도를 쉬지 않았다.
1950년 9월 17일, 이 날은 한국 오순절 제단에 순교의 피를 바친 날이다. 공산군은 퇴각하면서 박 장로를 무참히 난사했다. 최예임 사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웃음 띈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이 전파된 지 22년 만에 박 장로는 웃으면서 첫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때 나이 36세였다.
박 장로는 2001년 8월 한국교회 순교자 기념사업회 순교자로 등록되었으며, 2002년 3월 14일에는 순교기념비가 한국교회 순교자 기념관 입구에 세워졌다.
허홍 목사, 아버지로 교회를 품다
진정으로 교회다움을 세운 것은 허홍 목사다. 1975년 제10대 교역자로 부임한 허홍 목사는 교회를 사랑했고, 성도들을 자식처럼 보듬었다.
허 목사는 천상‘목사’였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그를 기억하는 모든 성도들은 한결같이 가식과 거짓이 없는 진실한 목사로 칭송한다.
절대 무리수를 두거나 화려한 목회를 추구하지 않았다. 시대적 혜안을 가지고 교회를 옮기려 했지만 성도 한 두 명이 반대를 하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허 목사는 교회가 갈등을 빚거나 시끄러운 것을 원치 않았다. 목사의 야망보다 교회 공동체의 생명과 평안이 중요했다.
그는 교회의 아버지였다. 방황하는 청년들을 가슴으로 품었다. 혹 문제를 이야기할 때는 조용히 불러 타일렀다. 사람들 앞에서 자존감을 깎아 내리지 않았다. 청년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다.
1982년 원로목사로 은퇴하기까지 교회는 한 번의 소용돌이도 없이 평안한 가운데 조용히 성장해 갔다.
1956년 10월에는 순천시 남내동 65번지에 첫 교회를 건축했다. 그리고 1985년 7월 17일 현재의 위치에 두 번째 성전을 건축했다.
김상백 목사, 무너진 순교역사를 다시 세우다
2014년 김상백 목사가 제15대 목사로 부임했을 때 교회는 무너진 상태였다. 허홍 목사 이후 14년 동안 후임 목회자들이 아름다운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지 못했다. 청년들은 흩어지고, 예배는 무기력했다.
김 목사는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예배회복과 오순절 역사 계승을 목회비전으로 제시했다.
순복음오순절교회는‘오순절교회’이름에서 보듯 60여년 전 오순절 성령운동을 일으킨 한국 성령운동의 어머니와 같은 교회다. 김 목사는 오순절 영성과 전통, 성령이 역사하는 예배 회복에 힘을 쏟았다. 또한 성령의 거룩함과 능력이 함께 하는 건강한 교회로 부흥하기 위해 목회 본질에 충실했다.
무엇보다 순복음오순절교회는 박헌근 장로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교회다. 오순절 순교신앙을 재조명하고 순교역사를 이어가야 한다. 초대교회 오순절 순교 영성을 계승하는 것이 곧 교회 회복운동이다. 매년 무안군 몽탄면에 위치한 박헌근 장로 순교자 묘역을 찾아 순교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의 유산을 기억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해피데이 전도축제, 추수감사절 날 ‘잃은 양 찾기’ 등을 통해 잠자던 생명구원운동을 깨우며, 교회의 옛 영광을 회복하고 있다. 현재 미얀마, 필리핀, 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열방을 향한 선교사역에도 적극 후원하고 있다. 아울러 전남 극동방송 설교, 순복음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국실천신학회 총무 역임, 한국오순절신학회 부회장 등 대내외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순복음오순절교회가 초대 한국교회 오순절 신앙과 순교의 역사를 계승해 새로운 성령의 부흥 역사를 써 가기를 기대한다.
김성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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