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국제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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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18 10:36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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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매우 흔하게 쓰이는 단어이다.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나라를 정상화하자”, “나라를 바로잡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해외에서 누군가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 한국인들은 “나라 망신”이라며 혀를 찬다. 교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라는 제목의 집회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하다. 성경에서도 “나라”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는 “나라가 임하시오며”(마 6:10)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고, 예수님께 구원을 간청한 죄수는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기도했다. 사도 바울 역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행 20:25)를 전파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나라’와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나라’는 의미와 뉘앙스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번 호에서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나라’와 현대 한국인이 받아들이는 ‘나라’의 개념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본 뒤,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모색해 보고자 한다.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에서 ‘나라’로 번역된 단어는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이다. 왕국이나 왕의 통치를 뜻하며 성경뿐 아니라 당대 일반 사회에서도 빈번하게 쓰였다. 예를 들면,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저서 『역사』에서 페르시아 제국을 ‘바실레이아’라고 불렀고,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셀레우코스와 같은 헬라 왕조를 가리킬 때에 ‘바실레이아’를 사용했다. 신약성경이 쓰이던 시기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 단어를 접하면 왕이나 황제가 지배권을 행사하고 그 권세가 미치는 영역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예컨대 마가복음 11장 10절에서 유다 백성들은 예수님을 향해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라고 외쳤는데, 이는 예수님이 실제로 지상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통치해 주시길 바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열망했던 “다윗의 나라”와 예수님이 이루신 ‘하나님 나라’에는 차이가 있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바실레이아 투 테우), 곧 하나님의 지배권에 속한 나라를 선포하셨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나라를 완성하셨다(마 21:43; 막 1:15; 눅 4:43; 요 3:3). 그 나라의 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셨다. 그러나 당대 로마 황제와 분봉왕들이 다스리던 세속적인 ‘바실레이아’와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바실레이아 투 테우’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넘나들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다. 예수님의 왕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살아계심에 뿌리를 두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부활로 완성됐다. 반면 세상의 제국과 왕국은 부패한 인간의 지혜와 제도로 세워지고, 탐욕과 폭력, 권모술수로 유지된다. 또한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는 성령의 권능과 인도로 움직이기에 인간의 예측과 계산을 뛰어넘지만, 세속적 왕국은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결핍된 능력으로 돌아간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는 그 어떤 지상의 국가 권력과도 비견될 수 없는 영광과 권세를 지니며, 그 빛은 그 어떤 별보다도 찬란하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나라’는 어떠할까? 신약성경이 쓰이던 시기의 사람들과 달리, 현대 한국인에게 ‘나라’는 왕이라는 절대적 인물과 무관한 공동체이다. 대한민국은 헌법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영국,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도 아니므로,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고 법보다 우위에 있다는 왕정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한반도에서 왕정이 폐지된 지 백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인들의 ‘나라’ 개념은 ‘삼권분립의 민주공화국’이라는 추상적 체계로 인식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결국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실레이아’와 현대 한국인이 떠올리는 ‘나라’ 개념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하나님 나라는, 왕권이 헌법과 무관하게 작동하던 고대 왕정의 개념에 더 가깝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는 국민·주권·영토가 정해진 헌법에 따라 운영되는 국가가 ‘나라’로 이해되므로,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그대로 현대 국가 체계와 일 대 일로 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신약성경 속 하나님 나라와 현대 대한민국의 나라 개념은 ‘그 나라를 바르게 세우려는 바람’이라는 면에서는 공통된 가치를 지닐 수 있다고 본다.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통치가 충만히 임하기를 기도하고 소망했듯이, 오늘날 한국인들도 이 땅에 법 질서가 공정하게 작동하고, 국민의 주권이 온당하게 지켜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신약성경 속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듯,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마땅히 법을 준수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국가 주권과 국토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신약성경의 ‘바실레이아’와 현대 한국인이 떠올리는 ‘나라’는 완전히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지만, 그 안에서 ‘나라를 위해 참되게 애쓰는 마음’이라는 연결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지점은 대한민국의 국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에게 큰 울림을 준다. 곧,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은 서로 다른 두 갈래가 아니라 함께 품을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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