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 요한의 침례
<국제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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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5-07-01 14:35본문
‘침례’는 신약성경에서 접할 수 있는 핵심 용어 중 하나이다. 헬라어 명사형은 ‘βάπτισμα’(밥티스마), 동사형은 ‘βαπτίζω’(밥티조)이며, 이는 본래 ‘담그다’, ‘잠기게 하다’, ‘적시다’는 의미를 지닌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물에 어떤 대상을 완전히 잠그는 행위를 가리킬 때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정한 종교 용어로 한정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대화편』에서 철학적 논쟁에 압도당하는 청년을 “침례 되고 있다.”라고 묘사하였고, 이 표현은 일상 언어 속에서 ‘압도됨’이나 ‘몰입됨’을 의미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일반적인 용어였던 ‘침례’(βάπτισμα, 밥티스마)는 신약성경 안에서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과 실천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교회 용어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 교회사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신학적 논쟁의 중심에 위치해 왔다. 오늘날에도 ‘침례’ 예식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념하는 상징이나 교회의 핵심적인 은혜의 통로 또는 그리스도의 계시적 현현으로서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침례’라는 용어를 해석하는 데에는 난점이 존재한다. 신약성경은 다양한 맥락에서 서로 다른 침례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침례 요한이 행한 침례, 예수님 또는 제자들이 베푼 침례,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 기록된 초대교회가 실천한 침례, 그리고 성령침례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과 의미는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침례 요한이 베푼 침례’를 중심으로 범위를 설정하고, 그 의미와 신학적 함의를 집중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침례자’라는 별칭에서 드러나듯, 요한이 침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은 사복음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언급되며, 사도행전에서도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 고는 사복음서에 나타난 요한의 침례의 의미를 포괄적으로 검토하며, 사도행전에서 요한의 침례가 어떻게 기억되고 해석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아울러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침례와 비교해 볼 것이다.
우선, 사복음서에 등장하는 침례 요한의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행위로서 중대한 신학적 의미를 지닌다. 마태복음은 이사야 40장 3절을 인용하여 요한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묘사하며, 요한이 메시아의 오심을 위해 백성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사역을 감당했음을 드러낸다(마 3:3). 이는 요한의 침례가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이나 정결 의식을 넘어, 구속사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한 강조가 나타난다. 요한은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요 1:31)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사역이 오시는 이, 즉 메시아를 드러내기 위한 도입부였음을 밝힌다.
둘째로, 요한의 침례는 회개를 통해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도록 촉구하는 선포적 행위로서 기능한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3:2)라고 외치며,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동시에,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 회개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특히 누가복음에서는 침례를 받으러 나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 3:7)라고 꾸짖는 장면을 통해, 요한의 침례가 단지 외적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회개와 삶의 열매를 요구하는 행위임을 강조한다.
셋째로, 사복음서는 요한의 침례와 장차 오실 이의 성령침례를 명확히 구별하여 서술한다. 요한은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침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선포한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이는 요한의 물침례가 외적 회개의 상징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침례는 인간의 내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임을 보여준다. 오순절 신학자 프랭크 마키아는, 성령의 침례자이신 성자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성령침례가 수취자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 안으로 이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두 침례 간의 구별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로써 요한의 침례는 예수님의 사역을 예표하는 선지자적 표징이자, 그 길을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으로 넘어오면, 요한의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구속사적 전환점으로 다시 조명된다. 사도행전 1장 5절에서 예수님은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시며, 요한의 침례와 성령침례를 명확히 구분하신다.
초대교회는 이러한 구분이 내면의 변화와 육체의 표징 모두에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했다. 내면적 변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요한의 침례는 회개와 메시아 도래의 준비라는 의미를 지니는 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성령침례는 성령님의 내주, 곧 새 언약의 인치심으로 이해하였다. 육체적 표징의 측면에서 본다면, 요한의 침례와 달리 성령침례는 방언이라는 언어적 표징을 수반했다. 사도행전 19장에 등장하는 에베소 제자들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들은 요한의 침례만을 알고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받을 것을 권면했다. 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자 성령님이 임하고,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요한의 침례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며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적 사역이자, 회개를 통한 새로운 삶의 촉구이며, 나아가 성령침례를 향한 구속사적 예표로 기능한다. 사도행전은 이러한 침례를 복음 시대의 문턱에 위치한 표징으로 조명하며,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현실로 나아가는 하나의 관문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요한의 침례는 그 자체로 완결된 의례라기보다, 성령 안에서의 참된 변화와 새 창조의 삶으로 인도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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