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
국제신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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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4-10-07 10:01본문
예전보다 요즘 세대 부모들은 자녀의 이름을 ‘온유’라고 짓는 경우가 많다. 먼저 부모 자신이 온유해지길 원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자녀들이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에서 온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이번 호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참된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성경에서 ‘온유’를 나타내는 주요 단어는 구약의 히브리어 형용사 ‘아나우’(עָנָו)와 신약의 헬라어 형용사 ‘프라위스’(πραΰς)와 그 파생 명사 ‘프라위테스’(πραΰτης)다. 먼저 히브리어 ‘아나우’는 ‘가난한, 고통받는, 겸손한, 온유한’ 등을 의미한다. 이는 ‘괴롭히다, 학대하다, 억지로 시키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나’(עָנָה)에서 유래했다. “곤고한(아나우)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하게 할지어다”(시 69:32). ‘아나우’는 고난 속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상태를 나타내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자를 의미한다. “야훼께서 겸손한(아나우) 자들은 붙드시고 악인들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시 147:6). “온유한(아나우) 자를 정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아나우) 자에게 그의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 25:9).
한편 헬라어 ‘프라위스’는 ‘온유한, 친절한, 겸손한, 동정심 많은, 힘이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 단어는 70인 역에서 히브리어 ‘아나’와 ‘아나우’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잘 길들여진 가축’을 의미한다. 본래 들에서 뛰어놀던 야생마가 조금씩 길들여져 주인의 통제 아래 복종하는 상태를 묘사한다. 그러나 이는 야생마의 힘이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전히 힘과 능력이 있지만 자기 욕심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오직 주인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절제하고 조절되는 것이다. 즉 성경에서 ‘프라위스’는 단순히 성격의 온화함을 넘어서, 힘은 있지만 그 힘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사용하는 것이다.
성경의 대표적인 온유한 인물은 모세와 예수님을 들 수 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아나우)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모세는 처음부터 온유한 사람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의 힘으로 동족을 구하려다 살인까지 저지르는 등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하지만 광야에서 40년간 고난을 겪으며 하나님께 길들여졌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거듭났다. 백성들의 불평과 비난에도 모세는 온유하게 대처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순종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온유함의 본을 보여주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프라위스)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연약한 인간이 되셨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살 때 사람들의 비방, 제자들의 배신, 십자가의 죽음 등 고난과 비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셨다. 한편, 불의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처하셨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마 23:33)라며 강하게 말씀하셨고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내쫓기도 하셨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무기력하거나 약한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히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힘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프라위스)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5).
성경이 말하는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길들여진 자로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비록 그 길이 고난의 길이거나 내 뜻과 다를지라도 그것이 가장 선한 길임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을 깊이 자각하며 겸손하게 살아간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힘과 권세를 절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하고 바른 일에 그것을 사용한다. 온유한 사람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돕는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그 과정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된다.
온유한 자가 받는 복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다. “온유한(프라위스)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예수님은 이 말씀을 시편 37편 11절을 인용하셨다. “그러나 온유한(아나우)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11). 여기서 ‘땅’은 단순히 물리적인 토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적인 기업을 나타낸다. 기업은 헬라어 ‘클레로노메오’(κληρονομέω)로 유산, 상속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온유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유산, 곧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는 죽어서 가는 천국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는 서로 긍휼히 여기고 이해하며 배려하는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며 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친다. 외적으로는 난폭한 자들이 땅을 차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진정한 정복은 온유한 자들이 이루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영원한 복과 평안을 얻으며,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간다. 온유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는 성품으로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는 데 꼭 필요한 성품이다. 외적인 강함은 경쟁을 부추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지만, 온유함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줘 우리의 지경을 넓혀 준다.
미국 신학자 리처드 마우는 그의 저서 『무례한 기독교』에서 “온유는 그리스도인이 잃어버린 소중한 성품 중 하나”라며, 남을 존중하고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강한 사람보다 온유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 온유한 자는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지 않아도 그들의 온유함 자체가 예수님을 증거하게 한다.
우리는 온유한 자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프라위테스)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약 3:13).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프라위스)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해 나가는 사람이다. 온유함을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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