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블레스 오블리주
성한용 목사(총회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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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8-11-14 11:11본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말이다. 돈 많은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것이 다른 이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 고마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가진 것, 배운 것을 필요한 이들에게 그저 나누어 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참사람이다.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백년 전쟁 당시 함락된 프랑스의 해안 도시 칼레의 시민 6인의 희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처형되어야 할 6명에 칼레의 상류층 사람들이 자원했다. 그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영국군 앞에 섰다. 로댕은 그 비장한 순간을 형상화했다. 굳게 다문 입, 역사의 비애를 짊어진 어깨, 그리고 빛나는 눈동자가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증언한다.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일은 얼마나 장엄한가!
여호수아는 정탐꾼을 보냈고, 정탐꾼들은 돌아와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아이성 쯤은 정복할 수 있다고 호기롭게 보고했다. 여호수아는 3000명의 군사를 보내 아이성을 치게 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실제로 이 성읍이 수용할 수 있는 인구는 고작해야 1000명 정도였다니 전술적으로 보아도 꽤 적절한 조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는 패배였다. 최초로 경험한 패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가슴은 위축되었고, 여호수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슬퍼하면서 옷을 찢고, 하나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저녁까지 있었다.
문제의 뿌리를 제거하지 않고는 어떤 승리도 기약할 수 없음을 알게 된 여호수아는 그 죄인을 찾기 위해 지파별로 사람들을 소집하고 제비를 뽑도록 했다. 그 원시적인 과정을 거쳐 마침내 아간이 범인임이 밝혀졌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아간은 순순히 자기의 범죄를 자백한다. 전리품 가운데 시날 지역에서 수입해 온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2.3kg), 오십 세겔(575g) 나가는 금덩이를 하나 숨겼다는 것이다. 그 물건을 보는 순간 그의 도덕적 자아는 눈을 감았고,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조차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은 모순 속에 있는 존재이다.
아간류의 사람들은 남을 배려할 줄 모른다. 제 좋을 대로 살 뿐이다. 말장난이지만 ‘아간’은 ‘악한’이다. 그들은 영적인 미숙아들이다. 그들에게는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 없다. 공적 공간을 사적으로 전유해 버리는 일도 많다.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낯 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남 눈치 보지 않고 살겠다는 결의는 장하지만, 그들이 다른 이들의 심령에 가하는 폭력은 심각하다. 공동체를 위해 자기 자신을 제한할 줄 아는 것이 교양이고 믿음이다.
“현대 사회의 특이한 병리 현상은 마땅히 공동체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을 사유화 한다는 사실이다.”
평화로운 세상, 생명이 넘실거리는 세상은 우리 가운데서 유배된 자비를 다시 회복하는 데 있다. 영성 신학자인 매튜 폭스는 자비심은 “우리 모두의 상호관계성을 깨달음으로써 발동된다”고 말한다. 자비는 일체감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매튜는 더 나아가 자비란 정의를 구현하고, 긍휼을 실천하는 것이며, 자기도취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비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무엇보다 ‘축제’와 ‘슬픔’이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삶을 경축하려는 마음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려는 마음이야말로 자비라는 말이다. 아간류의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삶을 경축하려 하지 않는다. 행복은 나눌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 향락을 누리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존재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친밀함을 바탕으로 하여 축제를 즐기는 이들은 많지 않다. 우리 시대가 풍요로움 속에서도 빈곤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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