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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하루같이

김산기 목사(충주지방회 증경회장, 수상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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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5-04-1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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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기목사.jpg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에게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로서 준비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주의 재림의 날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인데 주님은 여전히 변치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 같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우리들은 오늘의 믿음이 천년이 가도 변치 않아야 한다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나온 과거가 천년이 하루 같고 또한 앞으로의 미래가 하루가 천년같이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초행길은 가는 길이 먼 것 같고 오는 길은 가깝게 느껴지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고난의 시간은 긴 것 같고 행복한 시간은 짧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천국의 시간은 천년이 하루 같고 지옥의 시간은 하루가 천년같이 느껴질 것입니다.

 

세상의 낙은 천년을 산다고 해도 하루와 같은 일장춘몽이요, 천국은 하루를 살아도 세상의 천년의 낙보다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주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어떤 이들에 대한 해답은 주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주님의 재림이 임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못을 아직도 회개하지 않았는데, 주님이 오늘 오셨다면 기름 준비를 아직도 하지 않았는데 오셨다면, 우리는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복음 15장에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앞에 온전히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에 재림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회개하여 구원받아야 할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을 하면 주님의 자비와 한없는 긍휼하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내가 준비할 등에 기름이 무엇인가 그것이 채워져 있는가 확인할 때입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루를 천년 같이 가치 있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과거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자기의 시간과 물질로 정성스럽게 자기 몸과 같이 돌본 그 하루는 영생을 얻는 하루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까지 남을 돌보지 않고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이 보고 지나가던 사람인데 그 날 갑자기 선한 양심이 발동되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에게 남을 돕는 습관이 또한 남을 돕고. 남을 무시하는 습관이 남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가 평소에 쌓은 선에서 선한 실천을 한 것입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변함없이 상황이나 여건에 치우침이 없이 그것이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어 강도 만난 자를 돕는 것이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의 기회인 줄 알고 충성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는 두 행악자를 봅니다. 한편의 행악자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남을 저주하며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의 행악자는 그를 꾸짖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하며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며 회개합니다. 한 사람은 일평생 잘못을 하면서도 죽기까지 잘못을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않는 악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잘못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것을 후회하며 회개할 줄 아는 죄인이며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죄인을 찾으시며 그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가 천년을 아니 영원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어린 아들과 함께 버스를 탑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치마폭에 숨기고 자기 버스비만 냅니다. 다행히 운전사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운전사가 속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보고 계신 하나님은 속일 수 없고, 자기 양심은 속일 수 없고, 또한 그 거짓과 속임수를 아들에게 가르치고 그것을 심은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장차 그 아들이 남을 속이며 사는 그런 인생이 될 것은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의 한 일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했다 칭찬하시는 일을 했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것을 이루어 살았는지 그것이 천년을 위한 나의 심은 것이 되었는지 확인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매너리즘에 빠지기 쉽습니다. 목사다 장로다 하는 직분이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인 줄 착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불법을 행한 자들은 내게서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오를 회개하고 그 죄악에서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큰 자 높은 자를 섬기는 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고 낮은 자를 섬기고 돕는 자로 세우신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큰 자를 섬기려는 자는 많습니다. 그것은 큰 자를 섬겨야 크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큰 자가 되어야 세상의 영광을 누릴 수 있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영광을 받은 자는 이미 그 상을 받은 자요 주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높은 데서 내려보는 눈은 사람을 공평하게 보지 못하고 자기의 유불리로 편애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그러나 낮은 데서 올려 보는 눈은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귀한 존재로 보여 존경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 10절에 주님이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를 구별하시는 심판의 기준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목회 성공 기준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사명을 받아 생명을 바쳐 무에서 유를 창조한 개척자들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성도들이 강도 만난 이웃을 지극한 정성으로 돌봐주어 주막과 같은 교회로 인도한 헌신의 산물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날에 신부로서 성공한 다섯 처녀가 준비한 등에 기름은 무엇입니까? 지극히 작은 자 세상에서 강도 만나 상처받은 사람을 주님처럼 자신을 낮추어 섬기는 일을 주님만 아시도록 은밀히 충성한 것 그것이 준비된 기름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주님과 나만이 아는 그것을 내 삶의 등에 가득히 채우도록 준비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밀히 감추인 보화요 천국에 쌓아 둔 보물입니다.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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