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귀처럼, 맛디아처럼 그렇게
오세광 목사(서울강서남서지방회 증경회장, 성산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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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5-05-26 13:18본문
우화 중에 교만한 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개구리 마을에 있는 개구리들에게는 한가지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개구리들도 새들처럼 하늘을 한번 훨훨 날아보는 것이었다. 가장 호기심 많은 개구리가 독수리를 찾아가 사정했다. “나도 너처럼 멋있게 하늘을 날고 싶어. 그러니까 너의 다리를 붙잡고 한 번만 날게 해다오” 독수리는 개구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드디어 개구리는 독수리의 다리를 붙잡고 꿈에도 그리던 하늘로 날아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땅에 있는 개구리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하늘의 개구리를 바라보았다. 그중 한 개구리가 하늘의 개구리에게 물었다. “누가 이런 기막힌 생각을 했니?” 그러자 개구리는 우쭐해서 독수리를 붙잡은 손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했지!” 그 순간 개구리는 여지없이 땅으로 추락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런 개구리를 보면서 참으로 어리석다고 말한다. 과연 사람들은 이렇지 않을까? 나는 어리석은 개구리처럼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자기가 주인공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주인공을 위한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나와 있다. 과연 신앙인들이 주인공이신 예수님을 위해 조연으로 또는 엑스트라로 지내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 조연이나 엑스트라를 맡을 수 있는가?
기독교에서 의미가 큰 부활절이 얼마 전에 지나갔다. 부활절을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 주간이 있어야만 했다. 고난 주간 전에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멋지고 화려한 주일이 있다. 고난 주간마다 이 종려주일 장면을 많은 목사들이 설교하고 있다. 그런데 눈여겨 보아야 할 상황이 여기에 있다. 이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멋지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 장면에 정말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역할하고 있는 존재가 있다. 바로 나귀 새끼라고 하는 어린 나귀이다(요 12:14).
우리는 이 어린 나귀를 보면서 신앙인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볼 수 있다. 나귀는 원래 짐을 나르기 위한 존재이다. 그러한 나귀 중에 특별히 튼튼하고 잘생긴 나귀는 사람을 태우기도 한다. 그런데 이 어린 나귀는 종려주일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태웠으니 이 어린 나귀에게는 정말 가문의 영광일 것이다. 이 어린 나귀는 예수님을 태우고 많은 무리가 춤추며 찬양하며 예수님을 환영할 때 묵묵히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장면은 신앙인들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다.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천국에 가는 존재이다. 나귀가 묵묵히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 같이 우리는 예수님을 모시고, 섬기고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존재이다.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을 모시고 천국까지 묵묵히 나가야 한다.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때도 과감하게 물리치고 오직 예수님만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어린 나귀가 누구의 소유인지 어떤 집안에 나귀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 어린 나귀가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이라면 그가 어떤 집안의 사람인지, 어떤 교회 다니는지, 어떤 직분자이든지 간에 예수님을 모시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사도 맛디아를 볼 수 있다. 맛디아는 성경 복음서에는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어떠한 사람인지,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어떠한 성격이었는지 성경에는 언급이 없다. 그런데 유다 대신 사도를 선택할 때 조건이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려져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행 1:21-22). 따라서 맛디아는 모든 사도와 함께 예수님을 섬기면서 따라다녔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맛디아는 특별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의 제자였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지 눈에 보일 듯 말 듯 한 그런 존재였다는 것이다. 12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을 때 맛디아는 그곳에 없었고, 유월절 만찬 때도 그곳에 없었으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러 가실 때도 없었다. 다른 사도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칭찬받고 잘 나갈 때도 맛디아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긴 시간을 보냈다. 아마도 사람들의 눈에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이 맛디아를 볼 때 “저 사람은 뭐지?”라고 하며 수군거리며 비웃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눈에는 맛디아가 있으나 마나한 존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맛디아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섬긴 것이다. 이런 점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보신 것이다. 그래서 때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열두 사도 반열로 올려 주셨다. 우리도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주어진 일에 묵묵히 일을 하다 보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 칭찬하시고 축복하시고 갚아 주시리라 생각한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방문했다. 당시의 영적인 지도자인 사무엘의 방문은 이새에게는 엄청난 경사였을 것이다. 오늘날 자기집에 대통령이나 총리가 온다면 그곳에 참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모두 다 참석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새의 집에서는 모든 식구가 모여서 사무엘과 함께하면서 축복 기도 받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라면 모든 자녀가 선지자 사무엘에게 축복 기도를 받게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새는 모든 자녀를 불렀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한 사람이 빠졌다. 바로 다윗이다. 모든 가족이 선지자 사무엘과 함께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은 가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것처럼 보이고도 하고, 또 다르게 생각하면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무엘상 17:28을 보면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다윗은 형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무튼 집안에 경사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이 참석한 잔치에 부름을 받지 못한 다윗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들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고 있는 다윗을 들어 사용하신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 주위의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다 신실한 신앙인처럼 보인다. 헌금도 잘하고, 찬양도 잘하고, 열심히 봉사한다. 누가 알곡인지 쭉정이인지 알 수가 없다. 성경은 항상 깨어 있을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의 문화는 하루하루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AI의 엄청난 발전으로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고, 동물 복제는 물론 인간이 인간 생명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이때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겠는가? 예수님 오실 때가 아주 가까운 이때 어린 나귀처럼, 맛디아처럼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런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면 안 된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될 필요가 없다. 나의 삶에 주인이신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고 나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역할에 충성하기만 하면 된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나 한 달란트 받은 자나 받은 것에 충성하면 된다. 주님께서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 똑같이 칭찬하신 것을 기억하자. 잊지 말자. 인생의 주인공은 오작 예수님이고 나는 조연이거나 엑스트라라는 것을. 오 목사 스스로가 바라기는 예수님께서 각본을 쓰시고, 감독하시고, 주인공을 맡으신 작품에 조연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엑스트라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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