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기억되는 사람
임태우 목사(청주지방회 증경회장, 면류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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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3-04-13 11:39본문
코로나가 확산되자 마스크의 유용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회용품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귀중품이 된 것이다. 오죽하면 “돈 많은 부자에게 시집가지는 않아도 마스크 부자에게는 시집가겠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백신 접종과 자가 면역력 회복으로 마스크의 위력은 감소했고 과거의 위상만큼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지금은 그 마스크의 존재마저 사람들의 삶에서 잊혀져 가는 현실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쓰임을 받은 후 버림받는 인생들을 보게 된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러워졌기 때문이다. 더러워지면 버리거나 버림을 받는다.
목회자에게 가장 위험한 모습은 ‘교만’이다. 아니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공통의 위험 요소이기도 하다. 교만은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얕보는 허영과 오만이 마음 중심에 자리잡는 데서 비롯된다. 더불어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마음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우리를 더럽게 만들고 결국 버림을 받도록 이끈다. 그래서 성경은 잠언 16장 18절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패망’은 “파괴”, “산산이 부숨”을 의미한다. ‘넘어짐’은 “비틀거림”, “타락”을 말한다. ‘선봉’과 앞잡이는 모두 동일한 단어로 “얼굴”을 의미한다. 교만한 자세와 거만한 마음을 통해 우리는 산산이 부서져 버림으로 비틀거리고 타락하는 얼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게 된다.
또한 교만은 하나 됨을 해친다. 교만은 자신만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도 망친다. 어떤 이는 학벌이, 어떤 이는 물질이, 어떤 이는 지위가, 어떤 이는 교세가 자신을 그릇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주의 제자 됨을 말씀하실 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라고 말씀하셨다. 자기를 부인해야 주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교만의 반대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면 교만할 수 없고 사랑하면 교만하지 않는다.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 줄 수 있다.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주는 법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위임목사인 이영훈의 『사랑의 기적』에 증도에서 사역했던 문준경 전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문 전도사는 “대리거지”였다고 한다. 그녀가 불쌍한 사람들을 대신해서 얻어오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그를 기억하고 있다.
일전에 취미생활을 위해 찾은 모 풍란농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다. 어느 농장의 사장님에 대한 이야기다. 그분은 작고하셨는데 풍란인 가운데 그분을 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유인즉 돈이 없이 시작한 사업자에게 필요한 만큼의 풍란을 가져가서 팔게 한 후 대금을 받았고 좋은 난을 만들어도 가격을 터무니없이 요구하지 않았으며 난을 무료로도 많이 제공하셨다고 한다. 풀떼기를 가지고 내 것이 좋으니 나쁘니 옥신각신 다투며 남의 풀떼기에 대해서 흉보는 교만한 사람들조차도 그 분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끝까지 기억되는 사람은 엄청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을 마지막까지 실천한 사람이다. 있음으로 과시하고 교만할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끝까지 기억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기억하신다(행 10:4). 교만한 사람이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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