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하성 창립 70주년 특집Ⅰ[역사] / 1953년 4월 8일 본 교단 탄생 … 세계적 오순절교단으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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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주희 작성일23-11-15 13:25본문
오순절운동, 럼시 선교사 통해 한국에서 꽃을 피다
한국에서 오순절신앙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28년 럼시 선교사가 일본을 거쳐 서울 정동에 도착하면서부터다. 럼시 선교사는 미국 하나님의성회와는 관계없이 개인자격으로 내한했다. 그녀는 뉴욕시 인근에 있는 감리교회 성가대원이었는데, 1906년 4월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부흥집회에 참여했다가 성령침례를 받고, ‘한국으로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된다. 럼시는 같은 교회 교인인 덴버드의 지원을 받아 한국 선교의 열망을 이루게 됐다. 럼시 선교사가 여장을 푼 곳은 1903년 원산 부홍운동의 주역인 하디 목사가 기거하던 시(施)병원이었다. 이 병원은 의료 선교사 스크랜톤과 헤론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측 정동제일병원이었다.
럼시 선교사는 시병원 숙소에서 한국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길 기도하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가 구세군 조선본영 사무실까지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던 청년 허홍을 만나 오순절 신앙의 전파에 대하여 얘기하며 도움을 청했다. 허홍은 럼시 선교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럼시 선교사는 시병원을 선교본부로 삼고 한국에 오순절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허홍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은혜를 체험하도록 도우며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이들이 전파하기 시작한 메시지는 “오순절신앙은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며, 기도로써 병 고침을 받는다”며 체험적 신앙을 강조했다. 럼시 선교사가 내한한 지 5년 만인 1932년 4월 허홍과 럼시 선교사를 중심으로 최초의 오순절교회인 서빙고교회가 한국에 세워졌다.
서빙고교회를 시작으로 선교에 박차를 가하다
1930년에 미국 오순절교회 소속의 팔선 선교사 또한 개인자격으로 한국에 건너왔다. 팔선이 미국 오순절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편지로 요청함에 따라 1931년 영국 오순절교회의 평신도 선교사들인 메레디드와 베시 두 사람이 한국에 왔다. 이들도 개인자격으로 내한해 오순절 신앙을 전파했다.
럼시 선교사는 일본에 갔다가 일본 성서신학원에서 오순절신학을 공부하는 박성산을 만나고, 존 주르겐센 원장에게 박성산을 한국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박성산은 일본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서빙고교회를 담임하기 위해 귀국했다. 박성산은 ‘성령침례의 표적은 방언이며, 바람직한 기독 신앙은 사회참여’라고 말하며, 오순절신앙이란 사도행전에 입각한 근본주의 신앙으로서 방언, 신유, 권능의 세 가지는 성령침례를 받아야 이루어진다고 주장해 한국 교회로부터 이단 공격을 받았다. 그 핍박으로 인해서 오히려 최단시간에 최고의 성장을 이룬 오순절교단의 결집력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당시 조선 오순절교회에는 다른 선교팀도 있었다. 영국 선교사인 베시, 메레디드, 팔선과 일본에서 성서신학원을 졸업한 배부근이었다. 사직공원 앞 300미터 지점에 있는 그리스도의교회 건물을 임대해 1933년 5월 수창동교회를 세웠다. 1938년에는 조선 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 안수식이 열려 허홍, 박성산, 배부근이 목사로 세워졌다. 조선 오순절교회 역사상 최초의 목사 안수식은 정동에 있는 럼시 선교사의 집에서 있었으며 후일 이들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창립과 그 발전과정을 주도해 현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초석이 됐다. 그러나 일제의 기독교 탄압정책으로 1939년 선교사들이 강제 출국 당하고, 결국 교회는 문을 닫고 점차 쇠퇴했다.
오순절교회의 재건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자 해외로 떠났던 많은 인사들이 귀국했는데 그 중 일본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오순절 신앙을 전파하던 곽봉조, 윤성덕, 김성환, 김길윤 목사가 있었다. 그리고 초대인물 중 유일한 여성사도인 박귀임 전도사도 해방 후 순천지방을 중심으로 성령운동을 전개, 한국 오순절운동사에 중요한 한 장르를 개척했다. 성령 충만하고 뜨거운 열정을 가졌던 박귀임은 전라남도 순천 철도국에 근무하는 남동생 집에 가정교회를 세우고 성령운동을 크게 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출석하던 순천중앙장로교회로부터 성령운동을 추종하던 박귀임과 성도들은 출교를 당하게 된다. 출교 당한 박귀임과 성도들은 남내동에 허름한 가옥을 빌려 집회소를 정하고 1948년 3월에 대한기독교 순천 오순절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설립된 순천오순절교회는 전라도에 세워진 최초의 오순절교회가 된다. 6.25전쟁으로 인해 오순절 교회는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박헌근 장로의 순교였다. 박헌근 장로는 공산군이 점령한 순천지역에 있는 성도 집을 심방하면서 방언, 신유 등 오순절역사를 뜨겁게 일으켰다. 그러나 공산당원에 잡혀 순교했다. 한국에 오순절교회와 신앙이 전래된 지 22년이 되는 1950년 9월 말, 한국 오순절교회 최초의 순교자였다. 6.25전쟁을 통한 한국오순절교회의 참상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초의 한국오순절교회인 서빙고교회는 물론, 해방 전에 설립하였던 예배 처소마저 하나도 남김 없이 파괴됐다.
전쟁 중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부터 오순절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엘라우드 목사의 노력으로 1952년 미국 하나님의성회 동양 선교부장인 오스굿 목사가 한국을 방문해 허홍, 박성산, 배부근 목사 등을 만나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직접 조사했다. 그 결과 그해 12월 15일 미국 하나님의성회는 정식으로 체스넛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체스넛 선교사는 1953년 4월 8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총회에서 초대 총회장이 됐다. 이때 순복음신학원도 1953년 서울 용산구 한강로 1가 65번지 남부교회에서 기하성 교단과 함께 시작됐다.
세계 최대 교회로 성장한 여의도순복음교회
1960년대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가 급속하게 성장하고 조용기 목사의 설교가 전국적으로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조용기 목사는 한국을 대표하는 목회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2008년 5월 21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이영훈 목사가 취임하면서 아름다운 리더십 승계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본 교단의 위상을 전세계에 공고히 했다. 담임목사 취임 후 15년 동안 이영훈 목사는 5대양 6대주를 종횡무진하며 목회자로 신학자로 민간 외교사절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세계 교회 부흥의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겸손과 섬김의 리더십으로 순복음의 영성을 계승해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이영훈 목사는 올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창립 65주년을 맞아 교회의 부흥과 도약을 선포했다. 본 교단도 2만 교회 300만 성도를 목표로 나아갈 뜻을 모았다.
눈부신 발전에도 한국의 다른 교단과 마찬가지로 기하성 교단도 분열의 아픔을 피해갈 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의 창구는 계속 열어 놓았고, 통합을 향한 각고의 노력으로 지난 2018년 11월 20일 역사적인 대통합의 역사를 이루었다.
통합총회를 통해 5,200개 교회, 180만 성도를 자랑하는 대형교단으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향후 한국교회가 하나 되는 운동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대표총회장에 이영훈 목사, 공동총회장에 이태근 목사와 정동균 목사, 공동총무에 엄진용 목사와 송시웅 목사를 추대하는 등 통합정신에 따라 공동 임원으로 통합총회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기하성 역사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계승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통합총회 명칭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분명히 했다. 또한 통합총회 위상에 맞는 도덕성과 공정성을 바탕으로 한 통합헌법을 공포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를 비롯해 참석한 대의원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통합총회를 위해 헌신하고,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운동을 강력하게 일으켜 부흥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나가기를 뜨겁게 기도했다.
대표총회장 이영훈 목사는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 만에 하나 되자고 남북정상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하나 되는 길에 우리 교단도 이유 조건 없다. 하나 되어 한국교회의 대통합의 역사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자 한다”면서 “과거의 수치를 통렬히 반성하면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가야 한다.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제 소외 계층을 섬기고 사랑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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