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론과 오순절주의 / 신문철 교수(한세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기하성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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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자 작성일17-11-14 10:55본문
칭의론과 오순절주의
신문철 교수(한세대)
I. 들어가는 말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뷔테베르그 성당에 내걸면서 종교개혁은 시작되었다. 루터의 반박문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론적 구원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가톨릭교회는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해결하기보다 인간의 행위를 중심으로 구원관을 펼친 결과 면죄부의 판매, 연옥설의 활성화, 교황권의 강화라는 비성경적 원리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 극단적 연옥설의 강조, 행위의 구원에 대한 비판으로 촉발된 것이며, 결국 가톨릭교회의 구원관에 대한 비판적 개혁운동이었다. 루터에 의해 촉발된 개혁운동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음을 통해 얻는 ‘이신칭의’ 교리를 구원의 핵심교리로 발전시켰다.
루터와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논쟁의 핵심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은혜를 통한 ‘의의 전가’를 통해서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의를 통한 성도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완성되느냐?에 대한 논의라고 볼 수 있다. 루터에게 있어서 칭의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한 그리스도인의 밖에 있는 “완성된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믿음을 통하여 전가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법정적인 선언”이다. 루터는 율법적 행위에 의해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가톨릭의 구원교리에 반발하며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주장하였다. 자연스럽게 개신교의 칭의론은 로마 가톨릭의 ‘의의 주입’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전가’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칭의를 단번에 완성하셨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이루어진다고 루터는 믿었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 서론에서 “만일 (이신)칭의 교리가 상실되면, 모든 참된 기독교 교리가 상실된다”고 주장하면서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현대의 복음주의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이신칭의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들의 배아(胚芽)를 품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 교리가 적절히 해석될 때 기독교적 의미의 하나님의 본질과 인간 본질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신교 구원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신칭의”가 최근에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도전은 진보적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보수적 신학자에 의해서도 제기되고 있다. 바울의 새관점주의자들은 루터가 바울의 칭의와 율법을 잘못 해석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성도의 행위와 율법에 근거한 “언약적 율법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루터의 칭의론에 대한 비판에 참여하고 있다. 김세윤은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신학적이고 도덕적인 위기의 원인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는다.”는 전통적 칭의론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루터의 칭의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루터의 칭의론을 재해석하면서 최종적 칭의론 혹은 미래적 칭의론에 근거해서 자신의 칭의론을 전개하고 있다. 김세윤은 성화가 “칭의의 현재적 나타남”이라고 가르치면서 루터의 칭의 개념을 수정하고 있다. 또한, 성도들의 최종구원이 이신칭의에 근거하기보다 하나님의 이중적 사랑계명(마 22:40)을 지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완성된 칭의가 아닌 성화의 과정을 통해 완성될 수 있는 “종말론적 칭의론” 혹은 “과정적 칭의론”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새관점주의자들은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나 단회적이며 법정적인 것으로 해석하거나, 칭의의 결과로 성화로 나아간다는 전통적 해석을 거부한다. 그들은 믿음의 공동체로 입교하는 “최초의 칭의”와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최종적 칭의”를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공동체에 입교하여 최초의 칭의를 얻었지만, 율법을 지킴으로서 최종적 칭의를 완성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고 칭의가 거룩한 삶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는 불완전한 칭의론 혹은 미래적 칭의론을 주장하고 있다.
개신교는 루터의 칭의론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루터의 칭의론이 무너지면 개신교의 정체성도 무너지는 것이다. 오순절주의는 현대의 칭의론 논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통한 ‘이신칭의’ 교리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칭의를 받은 성도가 거룩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오순절주의는 제시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전통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적 성향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사역을 바탕으로 칭의론은 정립하였지만, 거룩한 삶을 이끌어 내는 데 실패하였다. 반면에 반-칭의론자들은 ‘언약적 율법주의’를 통해 성도의 거룩하고 율법적 삶에 대한 강조는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한 칭의론과 성령의 사역으로 나타나는 거룩한 삶에 대한 이해에서 실패하였다.
오순절주의가 현대 칭의론의 논쟁에 대한 하나의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은 오중복음이라고 생각된다. 오중복음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로 의롭게 된 신자들에게 성령의 통하여 주어진 중생, 성령침례(충만), 신유, 축복, 재림의 복음이다. 오중복음은 어떠한 인간적 의지와 노력으로도 찾을 수 없는 거듭남의 체험, 능력을 덧입기 위한 성령침례,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한 신유와 축복, 그리고 종말론적 심판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종교개혁 신학이다.
본 논문은 오순절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지지하며, 전통적 칭의론을 비판하는 현대 새관점주의(이하 반-칭의론)의 잘못된 사상을 비판할 것이다. 김세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국교회의 도덕적 타락은 칭의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올바른 성경적, 신학적 칭의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현대 칭의론 논쟁의 핵심주제들을 논의하고, 그리고 오순절주의 신학의 오중복음을 통하여 현대 칭의론 논쟁에 몇 가지 제언을 할 것이다.
II. 칭의론 논쟁의 핵심 주제들
현대 칭의론 논쟁에는 신학적 ‘함의’에 대한 해석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 존재한다.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사역에 대한 믿음을 통해 나타났다. 성도들이 의롭게 되는 것, 심지어 성도들의 거룩성까지 모든 논의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완전성과 그의 완전한 대속사역이 신학적 중심 주제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새관점주의(이하 반-칭의론)는 그리스도의 대속과 더불어 인간의 윤리적이고 율법적 행위가 인간의 구원에 필요하다는 공로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본 단락에서는 현대 칭의론 논쟁에 내재되어 있는 신학적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1. 칭의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인간의 율법적 행위’를 포함하는가?
현대 칭의론 논쟁의 핵심쟁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혹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한 구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율법적 행위가 필요한가?에 대한 논의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론을 강조하는 종교개혁 신학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에 그 신학적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와 저주와 구원의 문제를 십자가에서 이미 온전하고 완전하게 해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신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믿음의 사유를 통해서만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이해되고 나타날 수 있다. 현대에서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대변하고 있는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대속의 은혜는 오직 믿음의 사유를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이 믿음의 신학, 오직 믿음의 신학(of faith alone)이라는 사실이 명백해 질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오직 믿음을 통하여서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인식되어지고, 오직 믿음을 통하여 그것의 힘이 사유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십자가(Crux sola)에 대하여 상관을 맺는 것은 오직 믿음(soli fide)이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율법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반-칭의론자들은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언약적 율법을 맺고 계시기 때문에 언약백성들은 반드시 율법적 행위의 결과물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은 은혜로 구원을 받지만, 최종적 구원을 위해 거기에 합당한 선한 행실과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증명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김세윤은 바울신학을 루터의 칭의 개념으로 이해할 때 바울신학에서 중요한 윤리적 관점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종교개혁의 칭의론을 법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인’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다 ...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다. 하나님을 혼신을 다해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칭의’된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이 ‘이중사랑계명’ 즉 그리스도의 법(고전 9;21)을 지키며 살아야 하고, 그리하여 ‘의의 열매’(빌 1;11)를 맺어야 한다.
반-칭의론자들의 키워드는 언약이며, 언약적 율법주의는 그들에게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작용한다. 이로써 은혜언약과의 충돌이 발생한다. 여러 신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바울은 칭의의 주제를 다루면서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주의가 아니라 구약성경과 연관 지어 서술했다. 뿐만 아니라 결론이 행위구원으로 귀착한다는 사실에서 반-칭의론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와 일맥상통한다.
2. 칭의는 믿음으로만 얻게 되는가? 아니면 성도의 거룩한 삶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는가?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칭의는 단회적인 믿음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이 단번에 이루어진 구원사건 이듯이 칭의도 믿음을 통해서 단번에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요 법정적인 선언이다.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속해 있기 때문에 칭의는 성도의 삶을 통해서 획득하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값없이 전가되는 것이다. 한번 칭의를 받은 성도는 다시 의롭다함을 받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다. 칭의는 이미 선언되었고 인정된 하나님의 법정적 선언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전통은 칭의의 법정적이고 단회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칭의와 성화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다.
루터는 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설명하였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하신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무의 열매는 그 스스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좋은 열매의 근원인 나무에게 접붙혀 져야 한다. 좋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리듯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칭의된 자는 자연히 좋은 열매인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의 근원이 성도의 올바른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르면 칭의는 성화의 시작점이요 기반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진정한 칭의는 반드시 거룩한 삶인 성화의 열매를 맺게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거짓된 믿음이듯이, 성화가 없는 칭의는 거짓된 칭의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개혁의 전통에서 구원의 근거가 되는 칭의는 반드시 내면이 새롭게 되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를 이룬다고 강조하였다.
반면에 반-칭의론의 전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칭의와 성화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을 반대하고 성도의 칭의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완성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현대 반-칭의론자들은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삶의 변화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이신칭의’는 구원 받은 백성의 삶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마음대로 죄를 범해도 된다는 부정적인 확신을 갖게 했다는 것이다. 김세윤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칭의론’과 ‘구원론’이 잘못되어 한국교회가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반-칭의론자들은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성화에 대하여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칭의는 단회적으로 끝난 일이 아니라, 칭의 과정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최종적인 구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율법과 율법의 행위: 구원의 표지인가? 구원의 완성인가?
현대 칭의론 논쟁에서 떠오는 화두는 “언약적 율법주의”일 것이다. 샌더스는 자신의 방대한 연구를 통하여 예수님과 바울 당시의 유대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과 바울 당시의 유대교가 행위중심의 율법주의가 아니고 율법의 준수를 통해서 언약백성임을 확증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은혜의 언약 안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첫 번째 칭의를 받지만, 아직 완성된 칭의는 아니다. 언약적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하여 최종적인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샌더스를 비롯한 반-칭의론자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언약공동체 안에 머물 수 있으며 율법을 통하여 최종적인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임스 던도 마지막 심판은 “행위에 따라” 일어나므로 율법에 대한 순종이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던에 의하면 율법과 율법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응답이었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된 순종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하는 법도였다(레 18:5). 라이트도 현재적 칭의와 미래적 칭의를 구별하면서 현재적 칭의는 성도의 믿음에 근거하지만 미래적 칭의는 성도의 행위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반-칭의론자들에게 있어서 율법과 율법의 행위는 최종적 구원을 이루는 구원의 중요한 요소이다.
반면에 종교개혁의 전통은 예수님과 바울 당시의 유대교를 행위중심 혹은 공로중심의 율법주의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종교개혁 전통에 속한 이들은 율법을 통해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의 표지로서 행해야 하는 성도의 의무였다. 루터 이후의 종교개혁가들은 율법과 율법의 행위 자체가 구원의 자격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백성의 삶의 규범을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가르쳤다. 율법은 구원을 위한 최종관문이 아니다. 율법은 100점 맞으면 합격 혹은 80점 이상이면 통과, 아니면 낙제시키는 일종의 시험지가 아니라, 일단 구원에 합격한 사람들의 생활규범으로 주어진 것이다.
4. 최후심판의 기준은 믿음인가? 율법적 행위인가?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성도들의 구원이 칭의를 통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행위에 기초한 최후심판에도 현재적 칭의가 유효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완전성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고 더 이상 심판 가운데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현재적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 것이고, 최후심판은 성도들에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마귀와 믿지 않는 자 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또한, 칭의를 통해서 나타나는 행위의 열매는 칭의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칭의를 증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칭의론자들은 예수 믿고 칭의를 얻은 후에도 최종적인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세윤은 바울의 칭의론이 “이미와 아직”의 구도 속에서 종말의 완성 때까지 이어진다고 보았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의인이라고 선언(칭함) 받지만, 그것을 신약 구원론의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받을 선언을 지레 받는 것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때 있을 최후의 심판 때 온전히 받는다.
김세윤은 한국교회에 윤리와 삶이 결여되어 있는 이유를 전통적 칭의론에 대한 편협한 해석에 근거한다고 강조하면서, 칭의가 종말의 때까지 유보되었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칭의는 성도들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순종과 계명의 지킴 안에 머물기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세윤의 칭의 이해는 그리스도인이 윤리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구원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합당한 의의 열매와 선한 행위를 행한 자만이 얻을 수 있다.
III. 오순절주의와 칭의
오순절주의는 현대 칭의론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다. 오순절주의가 칭의론 논쟁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필자는 두 가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오순절주의는 신학적 논쟁이 교회의 영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이단 혹은 자유주의 신학과 논쟁을 벌여왔다. 논쟁의 결과 하나님의 진리는 지켜졌지만 이러한 논의가 교회를 교리주의로 전락시키는 과오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오순절주의는 종교개혁적 칭의론을 받아들이면서 성도의 칭의론에 머문 것이 아니라 칭의 이후 성도의 능력 있는 삶과 성령의 나타나심(고전 2:4-5)을 강조하여 왔다. 이와 같이 오순절주의는 칭의 이후 성도의 무기력한 삶에 대한 성화론의 문제점을 어느 정도 극복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는 현대 칭의론 논쟁에 대한 신학적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현대 칭의론과 연관된 오순절주의 신학을 간단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1. 오순절주의 칭의론
20세기 초에 발생한 오순절주의는 다양한 교파에 속한 목회자들에 의해 발생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은 근본주의 노선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는 종교개혁적 칭의론을 자연스럽게 그들의 교리로 받아들였다. 하나님의 성회 근본교리진술 제5조 “인간의 구속”을 보면 구원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을 통해 얻게 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인해 의롭게 됨으로, 영생의 희망에 따라 인간은 하나님의 상속인이 된다(눅 24:47; 요 3;3; 롬 10:13-15).”고 구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오순절주의는 신자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서 비롯되었다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죄인들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순종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다. 윌리암 멘지스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는 충족시킴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정의의 요구를 충족시킨 것이다. 이 속죄는 인간이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설 자리를 마련해 준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 . .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은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2-26).”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서 죄와 허물에 대한 용서를 받고,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죄가 완전하게 제거되었기 때문에 성도들은 “마치 전혀 죄를 지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의로워질”수 있다. 오순절주의는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음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게 되는 칭의는 죄인을 죄의 형벌에서 면제받게 하며,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의 대속사역과 성도의 믿음을 통해 값없이 얻게 되는 (이신)칭의에 대한 신학적 교리를 정립하고 있다. 오순절주의 칭의론은 종교개혁적 전통 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오순절주의와 완성된 갈보리 사역(“결정적 성화론”)
20세기 초 오순절운동은 크게 두 가지의 신학적 노선으로 양분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는 19세기 성결운동의 영향을 받은 오순절운동이다. 이 운동에 속한 사람들은 중생 이후 부패성의 제거를 통해 얻게 되는 성결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성결 이후에 선교를 위한 방언을 동반한 제3의 성령세례를 강조하였다. 초기 오순절운동에 속해 있던 파함과 시무어가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오순절운동의 창시자 찰스 파함은 구원의 세 단계에 대하여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 완성된 구원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중생과 성결과 성령세례의 세 단계로 나타난다고 가르쳤다. 성령은 성도를 거듭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하시고 자신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대위임 명령(마 28:18-20)을 완수하게 하신다. 파함에 의하면 오직 성령으로 거룩하고 성결된 성도만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고 능력 있는 복음증거자가 될 수 있다. 파함의 오순절운동을 이어 받은 시무어도 구원의 세 단계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다른 하나는 성결운동에 속해 있지 않은 다른 교단에 속해 있던 오순절 운동가들에 의해 나타났다. 특별히 침례교 출신의 윌리암 덜햄은 파함과 시무어와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파함은 그리스도의 대속이 이미 성도들의 성결 혹은 거룩한 삶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더 이상 성결에 신경을 쓰지 말고 오직 성령세레를 통해 방언을 말하고 능력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덜햄은 ‘그리스도의 갈보리 사역의 완전성’을 바탕으로 그리스도인의 거룩 혹은 성결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제2의 은총으로 중생 이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갈보리 십자가에서 성도의 거룩한 삶을 완성하였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덜햄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에 기초하여 중생과 회심의 순간에 성화가 함께 일어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갈보리 십자가 교리에서 십자가는 단지 과거의 죄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신자의 거룩한 삶까지도 단번에 이루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구원 이후에 성결을 위한 제2의 은혜가 필요 없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성도의 성결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덜햄의 주장을 “완성된 갈보리 사역”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덜햄은 신자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세례를 통한 성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서 이미 받은 성화의 은혜를 성령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3. 오순절주의와 성령(세례)
19세기 성결운동가들은 성결을 인간의 내면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의 제거’로 이해하였고, 오직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부패성이 제거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박명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웨슬리안은 인간의 부패성을 믿었고, 이 부패성 때문에 근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정적 계기가 없이는 성화의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내부적인 본래성 안에서는 성화의 가능성이 없고, 따라서 외부적인 성결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따라서 중생이나 성결은 본질적으로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웨슬리의 신학적 유산을 받은 성결운동가들은 성령을 ‘성결의 영’으로 이해하고, 성도가 성결함을 받고 거룩하여지는 것이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중생 이후 제2의 은혜로서 성결(화)을 주시는 성령에게 집중하였다. 한영태는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해 이같이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인간의 마음이 중생하고 성결케 하심으로 성결을 그에게 전달해 주시며,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 그의 성결을 나누어 받는 자가 되게 하신다. 성결은 시작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초기 오순절운동은 대부분 성결운동가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따라서 초기 오순절 신학도 중생 이후 부패성을 제거하고 온전하고 거룩한 헌신의 상태로 이끄시는 성령의 제2의 은혜인 성결을 강조하고, 이후 제3의 은혜로 방언을 동반한 성령세례를 강조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결운동에 속하지 않았고 침례교 출신인 덜햄은 성도의 성결 혹은 성화가 성령의 사역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역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성도의 거룩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었다.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완성된 대속사역’에 대한 가르침을 통하여 덜햄은 성령의 사역이 성도를 성결케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결하게 된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우신다고 가르쳤다(행 1:8). 덜햄에 의해 발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에 대한 믿음은 성도의 거룩함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한 칭의를 통해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주의는 성화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이해하였다. 성화가 ‘죄성의 제거’요 ‘부패성의 제거’라면 이 세상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다. 거룩은 (죄악된) 사람의 선하고 거룩한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거룩은 거룩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고 그 분 안에 속해 있을 때 거룩하게 될 수 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에 의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해 질 수 있다. 이것이 오순절주의에서 말하는 거룩성의 첫 번째 의미이다.
오순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출발점으로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대속사역을 완성한 후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요 14:16, 16:14; 롬 8:9). 거룩한 영이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온전히 임하실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에 의해 완성된 칭의, 성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오순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의롭게 되고 거룩하게 된 사람들에게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임하실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없다. 대신 성령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의롭게 하실 수 없다. 대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수 없다. 대신 성령은 우리를 거룩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신다. 따라서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거룩하게 된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죄를 이기는 삶, 거룩한 열매를 맺게 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이것이 거룩성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의미이다.
IV. 오순절주의와 오중복음
오순절주의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속해 있다. 성도가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되는 것이다. 덜햄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성도가 거룩하게 되는 것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에서 비롯된다. 박명수는 오순절주의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적 노선을 취한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오순절운동은 처음부터 기독론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이것은 특별히 비웨슬리안 계통에서 더욱 분명하다. 케직 사경회는 성결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설명하였고, 기독교연합선교회는 사중복음을 기독론적으로 설명하였다. 심프슨은 그의 유명한 찬송에서 그의 기독론 중심적인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 은사 원한 내게 은사의 주님, 신유 구한 내게 신유의 주님, 나의 마음속에 지금 오셨네. 나의 생명 되시는 내 예수님, 영원토록 모셔 내 기쁨 넘치네.” 심프슨은 그리스도 그 분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한편, 오순절주의를 대표하는 교파인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시작부터 “오직 예수의 이름”을 강조하는 “단일성 운동”에 대항하여 삼위일체에 대한 이론을 확고히 하였다. 하나님의 성회교단교리 제2조는 삼위일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 존재하시며, 신적인 본질로는 단일하신 한 하나님이시다(신 6:4; 사 43: 10-11; 마 28:19; 요 10:30). 삼위는 서로 혼돈되거나 혼합할 수 없고,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다. 삼위는 그 신성과 능력과 존재와 서열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다. 인간은 성자를 통하지 않고는 성부를 알 수 없고(요 14:6),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성자에게 갈 수 없으며(요 6:44),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성자를 주(Lord)로 고백할 수 없다(고전 12:3).” 오순절주의는 삼위일체 교리를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 중에 어느 한 분만을 높이지 않는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순절주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사역별로 시대별로 구분하고 있다. 구원의 계획은 성부의 역할이고, 죄의 대속은 성자의 역할이며, 구원의 사역은 성령의 역할이다. 또한, 오순절주의는 구원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면서 구약시대를 성부의 시대, 신약시대를 성자의 시대, 교회시대를 성령의 시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오순절주의는 삼위일체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나타내고 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의 뜻에 따라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도의 의와 거룩과 생명이 되셨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이 땅에서 성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는 법정적인 하나님의 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성령의 역사와 임재가 허락이 되고, 이를 통해 삶을 변화하는 능력이 그에게 부여됨으로써 의로운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삼위일체적 사역의 원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성령은 우리를 의로운 삶,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오순절주의의 오중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온전한 복음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며 거룩하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중생의 복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있고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과 그리스도의 몸을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통하여 세울 수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을 통하여 거룩해 질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통하여 언약백성으로서 ‘아브라함의 복’을 누릴 수 있고, 성령의 기름부으심 안에서 세상의 모든 물질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마지막 최후심판을 벗어나 휴거를 통하여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오중복음이 어떻게 현대 칭의론에 대한 해법을 제시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와 중생의 복음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모든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1-8).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사역을 통하여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거룩한 생명의 영이시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근거로 해서 죄인들을 중생케하신다. 거듭난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성령께서 성도들 변화시키는 성령의 내면적 사역이다. 내면적 변화의 중생과 동시적으로 성령은 외면적 사역을 함께 수행하시는데 회심(회개와 믿음)의 사건이다. 성령은 회개를 통하여 불신자를 죄로부터 돌이키게 만드시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게 하신다. 따라서 거듭남(중생)의 목적은 성도가 죄 용서함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서 그 분의 의를 전가 받는 믿음의 사건을 일으키는 것이고, 중생의 증거는 의와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성도를 중생케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믿음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가되게 하신다. 성령에 의한 중생의 사건은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들에게 전가되는 칭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사건은 곧 회심을 통한 칭의 사건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반-칭의론자들은 루터의 칭의론이 성도의 거룩한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칭의를 받은 성도들이 거룩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를 구별하여 말하였다. 보이는 교회는 알곡과 가라지(성도와 죄인들)가 함께 자라고 있는 지상의 교회이다. 보이는 교회 안에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영적인 교회이며, 중생하고 의롭고 거룩한 구원의 반열에 속한 사람이 활동하는 불가시적 교회이다. 루터는 진정으로 의롭게 된 성도는 자연스럽게 거룩한 열매를 맺게 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믿고 의롭게 된 자 가운데 의의 열매가 전혀 없는 사람이 있는 까닭은 구원받는 참 신앙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리스도의 칭의와 거룩함을 선물로 받지 못한 까닭이다. 진정한 거듭남의 체험이 없이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받지 못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 나라가 잘못 이해될 수 있고 칭의에 대한 오해가 나타날 수 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교회 안의 가라지(비신자)를 구분하기 위해 회심을 경험한 사람만을 교회의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청교도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성령을 통해서 회심의 경험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미국의 청교도주의자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이들이 명목상의 신자, 즉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는 교회가 불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알고 있다. 교회에는 ‘알곡’- 참된 신자-과 ‘가라지’-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마 13장)가 함께 있을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을 가져오는 “신적이고 영적인 빛”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직접 성도의 영(혼)에 비추어 주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 초자연적인 빛은 인간의 지성이나 다른 이차적인 수단을 통해 전달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성도의 영혼에 직접 전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이 “신적이며 영적인 빛”에 의해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회심의 체험을 경험하지 못하여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가질 수 있다. 하지만 회심의 체험 없이, 그리스도의 의에 전가 없이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김세윤은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교회 안에서 가라지와 불경건한 성도를 만드는 원인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교회 안에 가라지와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진정한 회심사건의 부재 때문이며, 회심사건을 통한 칭의의 부재라고 생각된다. 진정한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변화를 받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거듭난 성도, 의로움과 거룩함을 전가 받은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빛과 소금을 역할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모양만을 가지고 중생을 통하여 칭의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거룩한 삶의 능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명목상의 기독교와 싸워야 했다. 17세기 청교도들과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회에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을 선별하기 위해 교회 입회의 조건으로 회심체험을 요구하였다. 20세기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 있고 열매 맺는 삶을 강조하기 위해 성도가 거듭나고 의로워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선행은 믿음에서 생기며 믿음이 선행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은 하나님에서 오는 일이며, 믿음 자체도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 갈수 있을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침례(충만)의 복음
20세기 초에 나타난 오순절운동은 중생 이후의 성령침례를 강조하였다. 성령침례의 목적은 “선교와 봉사를 위한 그리스도의 증인”되기 위함이다. 중생한 성도들은 성령침례를 통하여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다(행 1:8). 성령의 증거는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그리스도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케리그마를 선포하는 것이다. 성령은 예수의 영으로서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함 받고 거듭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를 의롭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를 거룩하게 하신다. 따라서 성령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의로움과 거룩함의 신분을 얻게 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인도되고 그와 함께 연합되면 그리스도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대속하시고 우리의 의로움을 이루셨고, 율법의 요구를 순종하심으로 우리의 거룩함을 이루셨다. 성도는 중생(회심)을 통하여 죄악된 상태, 의롭지 못한 상태, 거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의롭고 거룩한 상태로 영원한 신분의 변화를 얻게 된다(딛 3:5). 중생과 회심을 통해 의로움과 거룩함을 얻게 된 성도는 성령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증인이 되며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성령은 성령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을 세우신다.
오순절주의 성령침례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우리에게 보냄을 받으신 성령의 나타나심과 은사와 열매에 대한 가르침을 포함한다. 십자가 신학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의 관점에서 온전한 거룩함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온전한 거룩함은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죄가 없이 사역을 하셨으며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이다. 우리가 거룩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것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연합이 될 때 가능하다. 따라서 성령은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선포함으로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세우시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질 때 우리는 온전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의 은사를 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다. 김현진은 성령충만에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외적인 성령의 은사와 내적성숙으로서 성령의 열매라고 강조한다. 성령충만으로서 외적인 성령의 은사와 내적인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만들며 이를 통해 성도의 거룩성이 보존된다.
3. 예수 그리스도와 신유의 복음
19세기 후반 성도의 거룩한 삶을 주장하고 나온 성결운동가들은 온전한 성결을 통하여 원죄의 부패성이 제거된다고 믿고 있었다. 만약 성령세례를 통하여 부패성이 제거되고 온전한 성결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육체의 질병도 치유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부패성의 제거라는 성결의 개념이 곧 육체의 질병에 대한 신유로 그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신유가 성도의 성결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성결운동가들의 신유론은 구원의 폭을 확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신유를 성화의 한 방편으로 이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질병이 다시 들어오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5:14). 이 말씀은 성결한 삶과 질병의 치유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신유를 체험한 성도들은 반드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삶이 거룩하지 않으면 질병의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화의 삶은 육체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온전한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은 성령침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완성된 대속사역을 통하여 불완전하고, 불경건하며, 마귀적인 질병을 치유하심으로 성도의 거룩성을 보존하신다.
성결운동가들에 영향을 받은 오순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신유를 포함시키고 있다. 오순절운동을 태동시킨 파함(Charles Parham)은 성결과 신유를 연결시켰다. 파함에 따르면 오직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만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 덕분에 영혼의 성화뿐만 아니라, 몸의 성화도 가능하게 되었다.” 누구나 성화에 의해 죄가 제거되고 거룩하게 되면 육체의 치유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박명수에 따르면 파함은 “그리스도의 대속 덕분에 영혼의 성화뿐만 아니라, 몸의 성화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성결운동과 신유운동을 병행함으로서 오순절주의 성화론을 확대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오순절주의자들은 질병이 죄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오직 성결한 사람만이 병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오순절주의 신유론은 사중복음의 형태로 신학적으로 정립되었고 신유와 성화가 밀접하게 연관을 갖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적인 죄만을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 질고도 십자가에서 짊어지셨다. 오순절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신유를 포함시키는 신학적 발상을 통하여 신유와 죄를 연결시켰다. 따라서 죄성을 제거하는 즉각적인 성결은 죄와 연결되어 있는 신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누구나 성결에 의해 죄가 제거되면 육체의 치유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의 대속교리를 통하여 성화의 완전성뿐만 아니라 육체의 성결까지 포함하는 전인적 성화론의 기초를 놓았다. 온전한 성화는 부패성의 제거와 이를 통한 성결의 삶뿐만 아니라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신유의 영역까지 포함하게 된 것이다. 오순절주의 신유론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대속과 칭의에 기인한다.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고 치유하는 분은 치료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칭의와 성도의 거룩한 삶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오순절주의 신유론은 현대 칭의론 논쟁에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와 축복의 복음
오순절주의는 사중복음을 가르쳐왔다. 오순절주의의 사중복음을 오중복음으로 변환시킨 오순절주의 목회자는 영산 조용기 목사(영산)이다. 영산은 그리스도의 삼중대속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질병뿐만 아니라 우리의 저주를 대속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가시와 엉겅퀴와 저주 가운데 있는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축복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오순절주의 축복관은 물질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과 연관된다. 성경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제시하는 창조교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교리로 이어지고 있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므로, 그가 창조하신 만유의 주권자 되시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오직 그 분께만 속해있고, 그 분의 주권 아래 있으므로, 그것들은 그 분의 뜻을 따라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성령침례를 받고 거룩하여진 성도는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향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오순절주의 축복론이다. 오순절주의 축복관은 그리스도인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이다.
영산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의 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대속은총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의와 통치를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축복의 근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피로 구속함을 얻어 영, 혼, 육이 의롭게 되었으면 필연적으로 범사에도 잘 되어야 한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이 가난하게 사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에게 부요를 주기 위한 것임을 알려준다고 영산은 강조한다. 영산의 축복론은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이 교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물질세계와 사회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영산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 축복의 핵심사상은 하나님의 풍성한 복을 받고 이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가난과 저주를 해결해 주셨음을 믿고 축복된 삶을 살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나누어 주는 삶을 살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누리는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5. 예수 그리스도와 재림의 복음
하나님의 성회 근본교리진술 제15조에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죽은 악인들이 살아나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 심판을 받게 될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마귀와 그의 천사들,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함께 둘째 사망인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에서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다(마 25:46; 막 9:43-48; 계 19:20; 20:11-15; 21:8).”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심판의 재림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의 현재적 나라에 속한 성도들은 심판이 아니라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반-칭의론자들은 성도의 구원이 현재적 구원이 아니라 미래적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순종함으로 최종적인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김세윤은 칭의 이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머무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머무름’은 성도의 구원이 최종심판 때까지 유보되기 때문에 성도는 끝까지 자신의 선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올바른 ‘머무름’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의인이라고 선언 받지만, 그것을 신약 구원의 종말론적 유보의 구조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받을 선언을 지레 받는 것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때 있을 최후의 심판 때 온전히 받는다.
김세윤의 칭의에 대한 종말론적 유보는 이중적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약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대하여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를 믿을 때 이미 시작되는 현재적 구원이지만, 아직은 이르지 않는 미래적 구원이라고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구조를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오순절주의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심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존 파이퍼는 새 관점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미래적 칭의에 반론을 제기한다. 라이트는 로마서 2:13을 두고 바울이 종말론적 심판을 거론하며 하나님의 최후적 인정이 바로 ‘마지막 칭의의 행위’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 파이퍼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칭의는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 실재 곧, ‘즉각적인 미래, 인접한 미래,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며, 칭의를 ‘미래적이며, 종말적인 개념에 의해 조종되거나 제어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구원의 재림이 아니라 심판의 재림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벧전 1:20; 요일 2:18).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대작 『신국론』에서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 도성의 두 왕국론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세상이 시작되면서 이 세상에는 두 도성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지상의 도성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도성은 자기를 멸시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건설되었다(제14권 28장).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이 두 나라를 결정적으로 구분하는 요소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재판은 두 나라에게 결정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두 나라가 명확하게 분리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결정적인 방법으로 저마다의 나라를 행복 또는 비참으로 인도하기보다는 선과 악으로 나눌 것이다. 지상 나라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은 영원한 불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이미 우리 가운데 온전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천국의 삶을 부여받고 “죄와 사망의 법”을 정복한 것이다(롬 8:1-2; 마 12:28).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아직 이루어지지지 않았고 미래적 심판으로 남겨놓으셨다. 따라서 성경적 종말은 하나님의 복음을 믿지 않는 모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마 25:34, 41, 46).
V. 나오는 말
본 논고는 현대 신학적 논의의 “뜨거운 감자”로서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칭의에 대한 문제를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이 주제에 대한 오순절주의적 시각을 밝힘으로써 교회와 신자들에게 건덕을 끼치기 위해 집필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로움을 얻은 신자는 반드시 성스러운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하며, 논자는 이 기본적 삶의 목표를 부정하는 그 어떤 논의도 결론적으로 궤변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김세윤과 같은 현대의 반-칭의론자들이 내놓는 주장의 핵심은 현대 기독교인들의 성화의 낮은 수준에 대한 개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현실적 이유를 우리가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일 수 있다. 성화의 수준이 낮은 현대 기독교인에 대하여 오순절주의 입장은, 성화의 수준이 낮다는 현실적 문제를 칭의론을 수정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반-칭의론)보다, 오히려 칭의론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접근해야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언약백성이 되는 그 과정의 의미를 더 명확히 알고, 그것을 신자들이 소중하게 여기도록 마음의 자세에 있어 성스러운 전환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만약 행위공덕을 더 강화하여 성화를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면 십자가의 의미는 크게 손상되고 말 것이다(“...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따라서 그리스도를 더 정확히 알고 그 분의 은혜를 감사하는 일이 구원의 핵심적 조건이라면 현대 성화의 낮은 수준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데서 발생하는 문제인 것이다. 즉, ‘시작(영접)이 잘 되었는데 끝(성화)에 문제가 생겼다’가 아니라 ‘시작이 잘 못되었기 때문에 끝에도 문제가 생겼다’로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철저함을 먼저 요구한다.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사역과 그리스도의 “완성된 갈보리 사역”을 통해 칭의와 거룩이라는 두 개념의 차이를 무난하게 극복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에 대한 통찰력은 그 어떤 교단이나 신학자들을 능가하는 깊고 체험적이며 신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오순절주의는 칭의론 논쟁에 대한 오중복음의 해법을 통해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충만함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구원은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리스도로 향하고, 그리스도로 종결된다. 그리스도가 없는 구원은 진정한 구원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죄인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게 하신다. 성령은 성령침례, 성령의 은사,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이신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하여 성도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성령은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시어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를 세워 가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접붙임을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치료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부정한 모든 질병을 치료하신다. 오순절주의에서 말하는 축복은 이제 그리스도의 통치가 교회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령은 4차원의 영적원리를 통하여 성도를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신다. 성령은 우리에게 거룩한 생각을 심어주시고, 거룩한 삶에 대한 꿈을 꾸게 하시며, 거룩한 삶이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고 선포하게 하신다. 성도의 거룩한 삶은 4차원의 영성을 통해 죄와 악의 세력을 이기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성령이 이끄시는 4차원의 영성에서 믿음은 우리가 무엇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음을 통해 얻는 것이다. 거룩함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이루어진 거룩함을 믿음을 통해 발견하고, 그것을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통해서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우리의 생각은 이미 이루어진 거룩함을 생각해야 하고, 거룩한 삶을 날마다 꿈꿔야 하며,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선포할 때 죄의 세력을 이기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히 11:1).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영화로움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 자신이 의로운 존재,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믿고 선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세계는 영적이며 믿음의 세계이다.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성령께서 일하시는 4차원의 영적세계이다.
칭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칭의에서 시작되는 거룩한 삶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구원은 결코 율법적 행위의 결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한국교회가 더 깊은 칭의에 대한 성찰과 성화를 위해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더 간구하고 기도하는 ‘마음의 부흥’이 더 시급한 일임을 전하며 본 논고를 마친다.
신문철 박사의 ‘칭의와 오중복음’ 에 관한 논평
성한용 박사(순복음총회신학대학, 실천신학교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칭의론에 관한 오순절주의 관점에서 본 새롭고도 의미 있는 주제를 발표해 준 신문철 박사께 심심한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 신문철 박사는 본 논문에 오순절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카톨릭 교회 의화의 교회론적 구원론과 의의 주입을 반대하면서 루터의 종교개혁 칭의론을 지지한다, 오순절주의는 현대의 칭의론 논쟁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하나의 제시할 수 있는 길은 오중복음이라고 주장한다. 본 신문철박사의 논문을 요약하면 넓게 천주교회 의화론, 루터의 칭의론, 새 관점주의자 3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로만 가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 의화(義化)는 개신교회에서 말하는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가 협력해야 구원을 이뤄진다는 신인 협력적 이해 구원의 과정을 중시한 구원론이다. 더 나아가, 타락한 인간의 구원은 십자가의 공로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해 그 분 보시기에 선한 것을 어느 정도 행해야만 가능해 진다고 가르친다. 그들에 따르면 공로가 부족한 신자는 연옥에 머물러 영혼이 정화되기까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천주교회의 구원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더불어 은혜에 근거한 인간의 선행(공로)이 있어야 온전한 구원이 이뤄진다고 말한다. 이는 넓은 의미에서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 성경을 바로 깨달았던 교회는 천주교회의 의화(義化)개념과 구원론에 비성서적 요소가 있음을 비판하면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일에 앞장섰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천주교회뿐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
둘째는, 의롭게 됨에 관한 루터의 가르침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의 가르침의 본질을 최대한 올바르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외래적(alien), 수동적, 완전한 ‘의’의 차원과 자신의(proper), 능동적, 점진적 ‘의’의 차원을 구별해 다룰 필요가 있다.
1. 외래적 ‘의’, 수동적 ‘의’, 완전한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인이 의인이 되는 구원에 관한 논의다. 즉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어떻게 설 수 있으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다. 루터는 인간적인 답을 피하고, 성서의 가르침에서 이 문제의 답을 찾아야한다고 역설한다. 루터가 찾은 답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다. 롬1:17에서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그런 ‘의’라는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을 연결시킬 수 있었다.
2. 자신의 ‘의’, 능동적 ‘의’, 점진적 ‘의’의 차원에서 어떻게 의인이 하나님, 이웃,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영적, 실존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다룬다. 즉 그리스도께서 능동적 의를 통해 믿는 자에게 믿음의 열매로서 사랑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으로 거짓 믿음이라고 단언한다.
셋째는, 새 관점주의자- 반 칭의론 자: 언약 적 율법주의, 과정적 칭의론
(샌더스(F.P.Sanders), 던(James D.G.Dunn), 라이트(N.T.Wright), 김세윤)
라이트는 샌더스가 제안한 언약적 율법주의와 던이 주장한 율법 및 율법행위에 대한 유대 민족적, 사회학적 접근은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샌더스, 던, 라이트 등은 바울의 칭의 가르침이 기본적으로 구원론적 주제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을 말하는 선교적, 교회론적 주제임을 강조한다. 새 관점의 주장대로 바울의 칭의 교리가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를 가짐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의’ 혹은 ‛칭의’의 가르침이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와 적용점을 갖고 있다 해서 하나님의 ‘의’, 칭의로 부터 구원론적 의미를 배제하는 것은 바울을 곡해하는 것이다.
발제자 신문철박사가 말하는 현대 칭의론 논쟁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논쟁이 가라앉기는커녕 가열되고 있으며, 국내신학계까지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다. 예를 들면, 구미(歐美)권에서는 2007년에 전통적인 칭의 교리를 사수하는 존 파이퍼(john piper)가 새 관점에 확산에 앞장서고 있는 라이트 (N. T. Wright)를 반박하는 《칭의 논쟁: 칭의 교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를 발간했다. 이에 라이트도 존 파이퍼를 재반박하는 《톰 라이트 칭의를 말한다》를 출간해 논쟁을 가열시키고 있다. 국내에서는 2010년도에 성경신학회,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한국개혁 신학회 등 여러 학회가 새 관점의 칭의를 비판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 2013년 이승구는 《톰 라이트에 대해 개혁 신학적 반응》을 출판하고 라이트를 반박하고 전통적인 칭의 교리를 옹호했다. 반면 같은 해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를 출간해 전통적인 입장과 새 관점을 검토 하면서, 양자의 장점을 새롭게 수용해 극복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동안의 칭의 논쟁은 다섯 가지 주제에 집중됐다. 발제자는 신학적 ‘함의’에 대한 5가지 핵심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이상에서 신문철박사 발제자는 오순절주의는 종교 개혁적 칭의론를 주장하면서 오순절 칭의론 근거로
1. 하나님의 성회 근본교리 제5조와 오순절 조직신학자 윌리암 멘지스의 그리스도 속죄사역으로 설명하면서, 결론적으로 오순절주의는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셨음에 대한 단순한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된다고 강조한다.
2. 발제자 신문철 박사는 19세기 성결운동의 영향을 준 초기 오순절 운동가 찰스 파함과 시무어를 말한다. 오순절 창시자 찰스 파함은 구원의 세 단계에 대해 말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통해 완성된 구원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중생과 성결과 성령세례의 세단계로 나타난다고 가르쳤다. 파함의 오순절운동을 이어받은 시무어도 구원의 세 단계에 대한 이해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윌리암 덜햄은 그리스도 완성된 갈보리 사역의 기초하여 중생과 회심의 순간에 성화가 함께 일어난다고 강조하였다.
3. 발제자 신문철 박사는 19세기 성결운동가들은 성결을 인간의 내면 속에 남아있는 부패성의 제거로 이해하였고, 오직 성령세례를 통해 부패성이 제거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오순절주의와 성령세례에 대해 박명수는 웨슬레의 신학적 유산을 받은 성결운동가들은 성령을 ‘성결의 영’으로 이해하고, 성도가 성결함을 받고 거룩하여지는 것이 성결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제2의 은혜로서 성결(화)을 주시는 성령에게 집중하였다. 따라서 오순절주의는 성화를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안에서 이해하였다.
요약하면, 신문철 박사는 오중복음이 어떻게 현대 칭의론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였는가?
1. 예수그리스도와 중생복음에서 반 칭의론자 김세윤은 종교개혁의 칭의론이 교회 안에서 가라지와 불경건한 성도를 만드는 원인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교회 안에 거룩하지 못한 성도를 만드는 것은 진정한 회심사건의 부재 때문이며, 회심의 사건을 통한 칭의의 부재라고 말한다. 20세기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인의 능력 있고, 열매 맺는 삶을 강조하기 위해 성도가 거듭나고 의로워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2. 예수그리스도와 성령침례(충만)의 복음에서 20세기 초에 나타난 오순절 운동은 중생 이후에 성령침례를 강조하였다. 김현진은 성령 충만으로서 외적인 은사와 내적인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만들며 이를 통해 성도의 거룩성이 보존된다. 고 강조한다.
3. 예수그리스도의 신유의 복음은 오순절운동을 태동시킨 파함(Charles Parham)은 성결과 신유를 연결시켰다. 박명수에 따르면 파함은 성결운동과 신유운동을 병행함으로써 오순절주의 성화론을 확대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4. 예수그리스도의 축복의 복음은 오순절주의는 사중복음 가르쳐 왔다. 오중복음을 주장한 영산은 하나님의 축복이 그리스도 대속과 그의 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5. 예수그리스도와 재림의 복음에서 김세윤의 칭의에 대한 신약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믿을 때 이미 시작되는 현재적 구원이지만, 아직 이르지 않는 미래적 구원이라고 하나님 나라의 이중적 구조를 받아들이고 있다. 존 파이퍼는 칭의를 미래적이며, 종말적인 개념에 의해 조종되거나 제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발제자는 하나님의 성회 근본교리 제15조의 최후의 심판에 대해 말한다.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심판의 재림으로 해석한다. 오순절주의는 칭의론 논쟁에 대한 오중복음의 해법을 통해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 충만함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결론적으로 논평자는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칭의론을 신문철박사가 씨름할 상대를 반 칭의론자/ 언약적 율법주의를 택한 것은 적절했다. 발제자에 오순절적 오중복음으로써 ‘반칭의론/ 언약적 율법주의의 극복을 시도한 것은 높이 평가 할만하다. 그리고 발제자가 ????김세윤이 주장한 것처럼 한국교회의 도덕적 타락은 칭의론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성경적, 신학적 칭의론에 대해 이해를 통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바울 칭의론에서 오순절주의 칭의와 오중복음으로 오순절 신학적 접근에 신문철박사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웨슬리 성결주의적 칭의론과 칼뱅의 칭의론을 비교 분석하여 오순절적 칭의/ 성화론을 정립하였으면 하고, 더 나아가 성결주의 순복음과 오중복음과 오순절적 순복음과 오중복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심도 있게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
칭의론은 개혁교회를 태동시켰을 뿐 아니라, 지난 500년간 개혁교회를 굳건히 지탱해 온 진리다. 이 교리가 바르게 전파될 때 마다 교회가 생명력으로 왕성해지고 건강하게 성장하며 부흥했다. 개혁교회에서 칭의교리는 구원메시지의 심장이며 심오한 영성의 바탕이고 복음의 젖줄이며 고통당하는 양심의 위안이었다. 또한 칭의의 복음이 타락한 교회를 돌이키는 가장 강력한 은혜의 방편이며 영적회복의 바탕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흥을 고대하는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한 것도 칭의의 복음이 부활하는 것이다.
논평자는 의미 있는 주제를 발표함으로 우리 오순절주의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물려받고 있는 귀한 진리들을 신학화 작업하는 데 더욱 박차를 가 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신 신문철 박사에게 진심으로 다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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