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의 종교개혁과 교훈 / 이동규 박사(청주순복음교회)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기하성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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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기자 작성일17-11-14 10:31본문
구약성경의 종교개혁과 교훈
이동규 박사(청주순복음교회)
1. 들어가는 말
“생명은 움직이는 속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고대 철학자의 삶에 대한 통찰이자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명제이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분명히 움직인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자신과 주변에 변화를 만들어낸다. 물론 이 변화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쉽게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미미한 것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예측을 넘어서는 큰 것도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개혁이다. 모든 생명이 움직인다면, 개혁은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숙제라 할 것이다.
인간의 제도와 체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변화와 같이 제도도 체제도 변화한다. 어떤 제도도 그리고 어떤 체제도 변하지 않고 머물러 영속하는 것은 없다. 분명히 변하게 되어 있고, 어디론가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속에는 우리의 신앙과 종교도 있다. 모든 생명이 변하듯이 우리의 신앙과 그 신앙을 담은 종교라는 그릇도 변화라는 운명 같은 숙제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이야기를 담은 성서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 속에는 변화의 여러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특별히 구약성경에는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여러 개혁적인 시도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진 왕정기의 개혁 시도들은 사울(삼상 7:2-17), 아사(왕상 15:9-15), 여호사밧(왕상 22:43-47), 요아스(왕하 12:4-16), 요담(왕하 15:34-35), 아하스(왕하 16:1-20), 히스기야(왕하 18:4), 요시야(왕하 22:3-7) 등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이렇듯 구약성경에서 개혁은 단속적으로 계속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구약성경의 모든 개혁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요시야에 의한 개혁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구약성경의 위대한 왕들이 존재하지만, 스위니(Marvin A. Sweeney)는 소위 신명기 역사가에 의해 이상적인 군주로 제시된 이는 다윗이나 솔로몬이 아닌 요시야였으며 나아가 요시야는 메시야와 같은 인물로까지 평가된다고 말한다. 요시야와 그의 개혁이 중요한 이유이다.
도처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 교회와 신학의 숙제를 말한다. 많은 사람이 지금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혼란한 시기이다. 본 논문은 우리에게 필요한 개혁을 그 근원에서부터 다시 살펴보려 한다. 요시야 종교개혁의 내용과 특징을 살피고, 구약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 종교개혁을 통해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이루어 가야 할 변화라는 주제, 특별히 오늘날의 교회와 신학이 이루어야 할 것들에 한 줄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2. 요시야 종교개혁의 상황과 내용
요시야는 구약성경의 위대한 개혁자로 알려지지만, 실제 그의 개혁에 대해 보도하는 성서본문은 제한되어 있다. 요시야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 예레미야와 스바냐는 그들의 이름으로 남겨진 성서에서 요시야의 개혁에 대해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특히 예레미야는 왕궁과 밀접하게 활동하여 여호야김과 시드기야에 대해서는 역사서에 버금갈 많은 이야기를 남겼지만 요시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요시야 개혁에 대한 기록은 오직 열왕기하와 역대기하에서만 찾아진다.
열왕기하와 역대기하에 위치하여 요시야의 개혁을 보고하는 성경의 주요한 두 기사의 서술에는 다소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기록의 시기와 자료 상호간의 연관성 등에 비추어 역대기보다 그 보고의 역사성을 더 인정받는 열왕기서에서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본문은 열왕기하 22-23장에 나타난다.
열왕기하 22-23장 본문 속에 나타난 문서와 편집층의 다양한 문제를 떠나 우리가 가진 현재의 본문에 나타난 요시야의 개혁과 그 주변의 상황을 내용에 따라 분해하면 아래와 같다.
열왕기하 22장
1-2절 요시야의 즉위 및 통치 요약
3-10절 성전 수리와 율법책의 발견
11-20절 율법책에 대한 왕의 반응과 훌다의 예언
열왕기하 23장
1-3절 언약체결
4-14절 유다에서의 개혁
15-20절 벧엘과 사마리에서의 개혁
21-23절 유월절 축제 준수
24-27절 요시야 개혁과 통치의 평가
28-30절 요시야의 죽음과 왕위 계승
요시야가 왕으로 즉위하던 때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아시리아의 봉신으로서 그 역할에 충실했던 므낫세의 오랜 통치 이후에 왕위에 오른 아몬은 통치 2년 만에 암살되고(왕하 21:19), 요시야가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유다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선왕의 암살 외에도 그의 즉위는 자연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이 반역의 사건을 수습하고 요시야를 왕으로 삼은 분명한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왕기하 21:24은 국민(원어로는 עם הארץ)이 요시야를 왕으로 삼았다고 보고하며 짧은 기간에 두 왕이 교체되는 어지러운 국내의 정황을 드러낸다.
동시에 국외의 상황도 녹록치 않았다. 히스기야 시기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으로 당시의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유다는 국제적인 혼란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강대국의 압력이 유다에게는 가혹했지만 므낫세의 시기와 같이 아시리아에 의해 지역의 국제 정치 구도가 안정되었을 때에는 유다의 처세를 결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요시야의 즉위와 맞물려 이집트의 26왕조가 세력을 확장하고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바빌로니아의 세력이 일어나면서 아시리아의 힘에 의한 질서가 무너지고 외교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가 되었다.
요시야의 개혁이 이루어진 시점이 바로 여기였다. 열왕기하의 보고에 따르면 요시야의 개혁은 그의 통치 십팔 년에 시작되었다. 요시야는 사반을 보내어 성전 보수를 명령하고 그 보수 과정 중에 율법책을 발견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개혁을 진행하였다. 율법책에 따라 온 백성을 모아서 언약을 체결하며 유월절을 지켰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역대기하의 보고는 열왕기하의 보고와 조금 다르다. 요시야가 통치 팔 년에 다윗의 하나님을 찾았고, 십이 년에 이미 종교 개혁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고 말한다. 이 정책은 유다 뿐 아니라 북 이스라엘 영토에까지 이르렀다. 이후에 예루살렘의 성전을 보수하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율법책이 발견된다. 율법책이 발견된 이후 일어나는 개혁의 진행은 열왕기하의 기사와 유사하다.
율법책이 그 중심에 위치한 요시야의 개혁은 종교적인 내용이 그 주로 나타난다. 열왕기하 23장은 그 개혁의 세부 내용으로 우상 숭배의 폐지(4-7절), 산당의 타파(8-10절), 예루살렘 성전과 그 주변의 정화(12-14절), 벧엘의 제단과 산당 파괴(15-20절), 유월절 준수(21-23절)를 말한다. 이 내용을 세세히 살피면 이 개혁이 단순히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만이 아니라 유다와 북 왕국 옛 영토의 제단과 산당이 그 대상이 되었고, 예루살렘의 제사장만이 아니라 서기관과 장로와 지방의 제사장과 온 백성까지 관련된 개혁이었다. 종교 체제와 세속 체제가 밀접히 연관된 유다에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요시야의 개혁은 정치와 사회와 경제적인 변화가 망라된 전국가적인 개혁이었던 것이다.
성서 기자들은 요시야의 개혁에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열왕기하와 역대기하의 해당 본문들, 그리고 외경인 제1에스드라서에 이르기까지 종교개혁으로 인한 요시야에 대한 평가는 유다의 역대 왕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는 이 평가에 미치지 못한다. 열왕기하의 본문은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내리지만(23:24-25) 이로 인해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았고 유다 멸망에 대한 야웨의 계획은 변함이 없음을 말한다(23:26-27). 요시야의 죽음 이후에도 유다의 안과 밖 상황은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요시야 개혁의 빛도 없이 유다는 점점 멸망의 어둠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3. 요시야 종교개혁의 요소와 특징
요시야가 구약성경의 여러 기자들에 의해 최고의 왕으로 평가받는 원인은 단연코 그의 개혁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의 여러 개혁들 가운데 요시야의 개혁이 최고의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은 무엇이었으며, 그의 개혁은 어떤 특징을 갖는가? 여기에서는 종교 개혁으로서의 요시야 개혁의 성격을 기억하면서 그와 관련된 사회 경제적 영향과 변화를 당시 야웨 종교를 국가종교로 가졌던 유다 사회의 특징을 염두에 두고 살피고자 한다.
1) 율법책 - 기준과 방향성
요시야의 개혁에 있어 율법책의 중요성은 본문 중에 이를 언급한 숫자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열왕기하 22-23장의 본문에서 히브리어를 기준으로 율법책은 열한 차례 언급되는데(왕하 22:8[2회], 10, 11, 13[2회], 16; 23:2, 3, 21, 24), 성전 보수 중에 발견한 율법책은 일련의 개혁의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본래 율법책에서 율법으로 번역된 토라(תורה)는 유대교에 있어 중요한 상징 중의 하나로서 주로 신의 메시지를 의미하는 데, 실제로는 이 토라를 수용하는 주체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었다. 구약성경에서의 토라는 제사장들에게는 주로 짧은 형태의 제의적 지침으로 주어졌고(학 2:11-13), 예언자들에게는 다른 용어인 다바르(דבר)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으며(사 1:10; 2:3), 지혜서들에는 자녀에게 주는 부모의 말(잠 6:20; 7:1-2)이나, 제자에게 주는 선생님의 가르침(잠 13:14)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포로 이후의 공동체에서 토라는 모세의 율법책으로 언급되며 현재의 오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착된다(느 8:1).
소년왕으로 즉위하여 일련의 개혁을 시작하는 요시야에게는 이 개혁을 정당화하고 힘있게 추진할 동력이 필요했다. 야웨 종교 국가였던 유다에 있어 아웨의 율법책은 여기에 적격이었고, 성서 기사에 따르면 실제로 이 역할을 담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책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있어 가장 본질적이고 기초적인 부분이라 말할 수 있다.
실제 율법책의 존재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동시에 구약성경의 언급처럼 율법책이 모세와 여호수아의 시대 이후로 사라졌다가 요시야 시대에 다시 발견되었다는 역사적인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시야의 경우와 같이 오래된 문서가 발견되고 이와 연관되어 일어나는 일련의 활동은 이스라엘과 같은 문화권인 고대 근동의 기록에서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주제이다.
이스라엘의 주변에서 요시야 개혁의 과정과 유사한 경우가 히타이트의 기록에서 나타난다. 주전 13-14세기 히타이트 제국의 왕인 무르쉴리(Muršili) 2세는 전염병으로 인해 신의 뜻을 구하는 데, 그의 기도문에서 그가 오래된 두 개의 서판(tablet)을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이것들은 오래된 제의를 기록하고 있었으며 무르쉴리는 그 내용의 진위를 신탁을 통하여 확인을 한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제의를 행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제의를 통해 전염병이 끝나기를 기도한다. 또한 무르쉴리를 이은 무와탈리(Muwatalli) 2세의 기록에서도 신의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을 고백하고, 이후에 그 기록을 찾아 잊혀진 제의와 규정들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유다와 같이 파피루스에 기록하는 관습을 가진 이집트에서도 유사한 경우가 나타난다. 이집트에서 오래된 두루마리 문서들이 발견되는 곳은 주로 신전의 신상 발 밑의 상자나, 문서고, 석관, 무덤이 된다. 이집트 13왕조의 왕비 멘투호텝(Mentuhotep)의 석관에서 발견된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 서문은 이 파피루스가 4왕조 시기의 토트(Thoth) 신상 발밑에서 발견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멤피스 신학(Memphite Theology)’으로 불리는 새김글(inscription)은 25왕조 샤바카(Shabaka) 재위기의 것인데, 이집트의 과거 영광을 재건하고 멤피스의 옛 영광을 찾으려 기록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서문에는 이 문서가 이전에 기록되었으나 벌레 먹고 손상된 것을 샤바카가 새롭게 기록했다고 전한다.
바빌로니아의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Nabonidus)의 기록도 주목할 만하다. 호고(好古)적인 성향을 가졌던 나보니두스는 새로운 신전을 세우고자 발굴과 정비를 행하게 된다. 이전에 신전이 위치했던 곳의 오래된 기초를 새로운 건축에 사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새김글들이 발견되는 데, 그 중의 하나는 샤마쉬(Shamash)신의 형상이 새겨진 상자의 옆에 새겨진 것이었다. 이 새김글은 약 3세기 전의 왕 나부-아플라–잇디나(Nabu-apla-iddina)가 기록한 것이었는데, 샤마쉬 신상이 오래 동안 사라진 것과 옛 신상이 유프라테스강 강둑에서 발견된 것,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샤마쉬 신상을 다시 만들어 태양신전에 세운 것을 말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고대 근동 기록들의 진위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위작(forgery)이라 할지라도 이 같은 기록의 존재는 고대의 문서를 발견하여 이를 근거로 진행되는 사업이 이 지역에 널리 알려지고 퍼진 주제였음을 드러낸다.
율법책의 발견과 그 내용을 확인하는 예언자 훌다에 대한 이야기 역시 율법책의 권위를 확인하는 분명한 표식이 된다. 여기에도 율법책과 함께 훌다의 이야기 자체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훌다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살필 필요가 있다. 훌다는 예루살렘의 둘째 구역에 살았는데(왕하 22:14), 이곳은 예루살렘의 서쪽 언덕을 말한다. 이 지역은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폐허가 되었다가 주전 2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포로에서 귀환한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버려진 이 지역을 요시야의 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훌다의 거주지로 말하는 것은 본문의 연대를 추산하는 데에 있어 간접적이지만 중요한 증거를 보여준다. 나아가 요시야의 종교개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 율법책의 권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당시에 공식적으로 활동했던 예언자들인 예레미야나 스바냐가 아닌 생소한 인물, 더욱이 성서에 드문 여자 예언자를 내세운 것은 이 본문의 내용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준다고 말할 것이다.
성전에서 일하는 남편이 있었던 훌다는 아마도 제의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며(왕하 22:14), 그녀가 율법책의 권위를 확인하는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는 것은 이 율법책의 성격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준다. 벤-도브(Jonathan Ben-Dov)는 열왕기하 22-23장의 신명기 편집 이전층(pre-Dtr)이 성전에서 발견된 책을 율법책으로 인지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오히려 처음에는 고대 근동의 왕실에서 행해졌던 전형적인 예언적 절차의 한 부분이었다고 주장한다. 고대 근동의 유사 자료들과 훌다에 대한 성서 기사는 결국 율법책의 일차적인 중요성이 신적 의지의 분명한 표현, 즉 야웨 신탁의 전달이었음을 드러낸다. 이후에 언급될 율법책의 여러 성격에도 불구하고 신탁을 통한 신적 의지가 그 기본이 되었다는 것은 요시야 개혁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준다.
착수된 개혁의 진행에 있어 율법책은 일종의 매뉴얼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전례가 없는 종교개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확실하고 권위 있는 신적 지지가 필요했을 뿐 아니라 지속적인 강화가 필요했다. 개혁의 상황에 있어 일반적으로 예견되는 현상, 즉 개혁을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 모두에게 있어 율법책은 필요한 단계마다 분명한 정당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동시에 예전에 주어졌지만 잊혀지고 변질된 신의 명령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보여주는 분명한 근거가 되었다.
고대 근동의 왕들이 개혁적인 정책을 시도할 때에는 주로 세 단계를 거쳤다. 첫째는 신탁 형태의 신의 명령을 받아 그 개혁의 정당성을 얻는 것이었고, 둘째는 이를 기반으로 오랫동안 잊혀졌던 관습의 복원을 중심으로 한 혁신적인 정책들을 담은 저작을 만드는 것이었으며, 마지막으로 분명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식자층과 엘리트들을 설득하기 위한 일련의 담화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마르둑을 최고신으로 올린 느부갓네살 1세나, 아슈르를 최고신으로 올리고 그 신전을 건축한 산헤립의 경우, 또한 월신(月神)인 씬(Sin)을 최고신으로 올리며 하란에 신전을 건축한 나보니두스의 행적에서 이와 같은 모습이 보여진다. 요시야의 경우에서도 이와 유사한 절차가 나타난다. 율법책의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훌다를 통한 신탁과 신적인 명령이 주어지고, 신탁 외에도 종교 개혁과 예식의 규정들을 담고 있는 율법책이 존재했으며, 이어서 언약체결 의식과 유월절 축제를 통한 여러 계층들과의 담화와 개혁이 확산이 실행되었다.
개혁의 확산에 있어 율법책을 기반으로 하여 유월절을 지키는 것과 종교적인 제의들을 수행하는 것을 볼 때 율법책은 단순한 신탁이나 계명을 기록한 것이 아니었으며 구체적인 규정과 지침들을 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열왕기와 차이가 있는 역대기의 기록은 아마도 이런 측면을 보다 자세히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제사나 예전(liturgy)만이 아닌 언약 체결과 축제일 준수 같은 종교적인 행위들을 기록한 율법책에 기반했다는 것은 이후에 중요한 발전으로 이어진다. 종교적인 삶에 있어 책의 존재가 단순히 가이드의 역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중요한 종교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 율법책과 이를 기반으로 한 요시야의 개혁을 통해 결국 토라는 이스라엘 종교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단순한 책으로서가 아니라 개혁의 근본이요 개혁의 방향을 지휘하는 매뉴얼이었던 율법책은 결국 요시야가 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책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적 영성으로까지 발전하여 이후 유대교에서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2) 전(全)국가적 개혁 – 사회적 포용과 포섭
(1) 종교개혁의 확장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살피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시 유다는 종교가 사회 여러 분야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사회의 각 부분이 서로 독립되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맞물려 흘러가지만, 요시야 당시의 종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존재 가치를 가졌다. 즉 요시야의 개혁은 당시 사회에서 종교개혁을 넘어서는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개혁이었다.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열왕기와 역대기의 두 기록에서 특별히 중요한 차이는 율법책 발견의 시기이다. 열왕기는 개혁의 시초에 발견했다고 보고하여 율법책과 종교적 개혁의 고리를 처음부터 강하게 나타내지만, 역대기는 요시야가 개혁의 중간에 율법책을 발견했다고 기록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두 본문의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차이와 그 진실성의 문제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지만 여기에서 다루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역대기의 기록을 완전한 허구로 치부하지 않는다면 요시야의 개혁은 율법책이 발견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율법책의 중요성은 개혁 전반에 걸쳐있지만 요시야에 의한 개혁이 그 율법책의 발견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개혁이 시초에서부터 단순히 종교개혁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유다의 종교적인 변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야웨 종교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의 변화였다. 열왕기서에 따르면 솔로몬에 의해 건축된 이 성전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파괴되기까지 그 구조와 구성에 중요한 변화가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요담이 성전의 윗문을 건축한 것과(왕하 15:35), 아하스가 아시리아 왕으로 인해 낭실을 옮겨 세운 것(왕하 16:17-18) 정도이다. 하지만 이 두 개의 변화보다 더 주목을 받는 것은 요아스(왕하 12:4-16)와 요시야(왕하 22:3-7)의 시대에 이루어진 성전 보수이다. 열왕기서는 이 두 사건을 보다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록에 의하면 이 보수는 성전의 내부와 외부에 어떤 변화를 준 건축 공사가 아니라 필요한 수리와 단장을 한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왕국 시대를 거쳐 점진적으로 확장되었음을 주장하는 일부 학자들은 요아스와 요시야에 의한 성전 보수가 단순한 보수가 아니라 성전 확장의 중요한 단계를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의 현재 지정학적 특성은 이 부분의 확인을 허락하지 않고 현존하는 문헌 자료 역시 이런 점진적 확장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요아스의 성전 보수(왕하 12:9-16)와 요시야의 성전 보수(왕하 22:3-7)를 보고하는 두 본문은 이 두 사건이 유사한 흐름으로 진행되었음을 말한다. 이들은 성전을 수리하고 그 근로자들을 감독하는 데에 있어 왕의 서기관과 대제사장이 함께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으며, 성전에 드린 은을 성전 보수에 사용하게 하고, 감독관의 진실함을 신뢰하여 그들에게 맡긴 은을 회계하지 않도록 했다.
특별히 성전 보수에 대제사장만이 아니라 왕의 서기관이 관여하도록 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사업이 단순히 종교적인 측면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 시기에 바빌로니아의 우룩(Uruk)에서 진행된 에안나(Eanna) 신전의 공사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이 나타난다. 이 기록을 보면 신전의 총책임자(šatammu)와 왕실 관료(reš šarri)가 신전 공사를 진행하는 기술자들을 함께 감독했다. 고대 근동과 유다 왕국에서 보이는 관료와 사제의 협력은 종교적인 사업에 있어 자금 조달과 감독 문제에 왕실이 광범위하게 관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요아스와 요시야의 보수가 실제 증축이나 건물 구조의 변화가 아니었다는 것은 내면적이고 구조적인 개혁의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종교적인 건물인 성전 보수의 내외부적인 진행은 종교적인 측면을 넘어선 왕실의 정치적인 활동의 일부였던 것이다.
정치와 종교의 밀접한 관련은 산당(high places)에 대한 처리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산당의 타파는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 데, 이 중요성은 열왕기하 23장에의 종교개혁 해당 본문 중에서 열 번에 달하는 “산당”의 언급을 통해 확인된다(왕하 23:5, 8[2회], 9, 13, 15[3회], 19, 20).
실제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산당의 타파는 표면적인 내용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유다의 각 지역에 위치한 산당은 본래 합법적인 제의 장소였다. 여호수아서와 사무엘서에는 산당이 제의 장소로 사용되는 데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이후에 이방 제의와 관련이 되어 야웨 신앙을 더럽히는 혼합 신앙의 근원지로 여겨진다. 프로반(Iain W. Provan)은 열왕기상 15장으로부터 열왕기하 12장에 나오는 산당이 본래 참된 야웨 숭배의 장소로 간주되었다고 말하며, 산당에 대한 비판은 우상숭배 문제가 아닌 야웨 제의의 집중화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헤르조그(Zeev Herzog)과 카톤(Janice E. Carton) 역시 예루살렘 제의 집중화 이전에 유다 왕국의 있던 산당은 “지역 성소(provincial sanctuaries)”로서 기능하였다고 주장한다. 결국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산당의 타파는 단순한 종교적인 정결화가 목적이 아닌 예루살렘으로의 제의 집중화가 주된 의도였다. 산당을 철폐한 것은 단순히 야웨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것 이상이었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다의 종교 체계를 바꾸는 일이자 종교와 밀접한 국가 체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이었다.
요시야의 개혁이 종교적인 의미와 의도만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종교가 국가의 전반에 밀착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 관련된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을 포괄하는 개혁이었음은 개혁 기사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요시야의 개혁 보고 가운데에는 예루살렘 앞 멸망의 산 오른쪽에 있는 산당을 부정하게 한 것이 있다(왕하 23:13). 이것들은 유다의 이전 왕들이 세운 것들 중 일부였는데, 여기에서 이루어진 이방 제의는 일반 백성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왕실 외교와 정치의 산물이었다. 이 기사는 요시야의 개혁이 이전 왕들이 남긴 외교적이고 정치적인 것들의 변화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그린스판(Frederick E. Greenspahn)은 요시야의 성소 단일화는 실제적인 신명기의 요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신명기의 기원에 대한 주요한 주장 중에서 북왕국 기원설을 고려하고 동시에 신명기에 등장하는 제의에 대한 계명의 분석을 살피면, 신명기 12장 5절의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과 14절의 표현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이 제의의 장소로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곳이 예루살렘임을 말하는 곳은 신명기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신명기의 제의 중앙화 요구는 예루살렘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지만 신명기에 기반을 둔 요시야의 개혁은 그와 같이 이해하고 정책적으로 추진하였을 가능성을 말한다. 요시야 이전에는 정책적이고 종교적으로 합법적이었던 곳이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변하게 된 것은 요시야 개혁의 중요한 특성을 드러낸다.
이같은 시도는 요시야가 처음 한 것은 아니었다. 구약성경에서 산당의 타파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또 다른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이다. 히스기야 시기에도 산당의 철폐가 있었는데, 배희숙은 히스기야가 200년 이상 계속되던 산당 제의를 철폐한 것은 두 가지 효과를 의도한 비상조치였다고 주장한다. 내적으로는 경제력의 중앙화와 재분배를 위함이었고, 외적으로는 아시리아로 흘러가는 자금을 막으려는 군사적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장선상에서 요시야의 산당 개혁은 히스기야 보다 더 근본적이고 영구적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은 히스기야도 요시야도 종교적인 개혁을 수행했다고 보고하지만 그 이면에는 더 큰 계획과 고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요시야 개혁의 중요한 대상은 산당과 성전 같은 장소에서 멈추지 않는다. 요시야는 제사장 제도를 개혁하는데, 그의 제사장 개혁에 대한 본문에서 지역 성소에서 일하던 제사장에 대한 처분은 두 부류로 나뉜다. 개혁에 의해 한 부류는 그 직무를 박탈당했고(왕하 23:5), 다른 부류는 예루살렘으로 옮겨져서 그곳의 제사장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왕하 23:8). 우리 성서에는같은 제사장으로 표현지만 히브리어 본문에는 이 두 부류의 제사장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르다. 직무를 박탈당한 5절의 제사장은 코메르(כמר)이고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8절의 제사장은 코헨이다. 코헨(כהן)은 일반적인 야웨 종교의 제사장을 일컫는데 쓰이지만, 코메르는 페니키아와 아람의 기록에서 자신들의 제사장을 일컫는 말로 등장하며 구약성경에서는 바알 제의와 연결되어 등장한다(습 1:4). 그 쓰임새를 볼 때 요시야 본문에서는 이방 제의를 관장하는 제사장들을 통칭하여 코메르로 부르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이들도 이전 왕의 통치 하에서는 합법적인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는 데에 있다. 유다의 지방 제사장들은 제사장 이상의 직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역할 뿐 아니라 교육적이고 사법적인 역할도 담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제사장 제도의 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직무의 재편일 뿐 아니라 제의, 사법, 교육 등 기존의 정치와 권력 구조의 개편을 의미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있어 고려할 또 다른 면은 당시에 유다가 처한 국가적이고 외교적인 상황이다. 하경택은 요시야의 유월절 준수가 이스라엘과 야웨와의 관계 회복을 의미함과 동시에 출애굽 사건의 기념을 통해 강대국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정체성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또한 스위니는 요시야의 개혁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일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다고 파악하며, 이 개혁의 배경이 된 신명기는 중앙화된 국가의 권한 강화를 통해 예루살렘과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백성을 연합시키려는 법체계 개정의 시도였다고 주장한다. 북왕국의 유민들을 포용하는 국가의 통합과, 국제적인 정세에 따른 자주권의 회복, 그리고 국가 권력의 강화까지 다양한 동인이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읽혀진다는 이들의 주장은 개혁의 또 다른 면인 국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요시야 개혁의 내용과 영향은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중앙 집중화와 그 규정을 보여주는 신명기 16:16을 보면 유다의 제사 제도는 국가 생산의 상당 부분을 왕궁으로 징수하는 중요한 국가적 제도였다. 기존에 지방 성소에서 담당하던 이 징수 경로를 바꾸는 것은 국가의 세수 및 경제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시야는 신명기의 구체화된 조항에 따라 국가 수입의 징수 경로를 변화하는 개혁을 추진한다. 백성들이 제사물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하되, 거리가 먼 곳에 사는 자들은 해당하는 만큼 은을 가져올 수 있으며 (신 14:24-25), 그 가운데서 여행 경비를 제할 수 있게 했고 (신 12:7, 12, 18; 14:23, 26; 16:7-8, 11, 14; 26:11), 이 순례여행을 장려하기 위해 제사하는 날을 보다 인상적인 축제일로 바꾸었다. 헬쩌(Michael Heltzer)는 인장(seal) 연구를 통해 요시야 통치 초기에 이미 세금 징수 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고, 통치 후반에는 이에 대한 통제를 보다 확실히 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요시야의 지방 성소에 대한 종교적인 개혁은 지방에서 중앙으로 그 경로를 변화하는 유다의 세수 제도 변화를 의미했고, 이는 필연적으로 전국가적인 경제 사회 권력 구조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2) 포용과 포섭
왕의 통치 행위는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복잡한 권력 관계가 얽혀있고, 그에 따라 왕을 돕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나뉘게 된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종교 부문을 넘어 전국가적인 사건이었기에 그를 둘러싼 세력의 구분도 국가 전체에 이르렀다.
본래 요시야는 지지 세력이 분명한 왕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왕위 승계는 자연스럽게 된 것이 아니라 부왕의 암살 이후 “암 하아레츠(עם הארץ)”라는 세력에 의해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이루어진 것이었다(왕하 21:24). 이들은 통치 초기 요시야의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후원자였을 것이다.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요시야는 상당 기간 동안 섭정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인데, 부왕이나 선왕이 없는 상태에서 요시야의 어머니나 그의 즉위를 도운 유력한 세력이 이 역할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초기부터 단독으로 통치 행위를 하기 보다 다른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요시야의 통치는 그의 통치 전반에 걸쳐 이어진다. 역대기의 보고에 따르면 열왕기에 나오지 않는 요시야 통치 팔 년의 기사가 나오는 데, 바릭(W. Boyd Barrick)은 대제사장 계보의 재구성을 통해 요시야 통치 팔 년이라는 연도가 대제사장 힐기야의 취임과 연관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성인이 되어가는 요시야가 처음 다윗의 하나님을 찾은 것과 그로부터 사년 후에 개혁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이 새로운 대제사장이 요시야와 밀착되어 개혁의 배후가 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개혁에 대한 보고의 도처에 등장한 여러 인물들은 개혁이라는 요시야의 통치 행위가 여러 사회적 집단들과 관련됨을 드러낸다.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왕정 시대라 하여도 이와 같은 세력의 분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다의 개혁 왕 가운데 요아스와 요시야 사이의 유사성은 이미 언급된 바 있는 데, 열왕기하 12:9 이하의 본문은 성전 보수에 대한 요아스의 명령을 제사장들이 실행하지 않은 사실을 보고한다. 이것은 왕이 주도하는 성전 관리를 제사장들에 대한 권리 침해로 여겨 저항한 사건으로 간주되며, 종교 부문을 포함한 왕의 통치 행위에 대해 반대하는 세력의 존재를 보여준다.
위에서 살핀 대로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사회 전반에 걸친 큰 변화였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날 때는 이러한 변화로 혜택을 입는 쪽과 손해를 입는 쪽이 필연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되고 서로 반대의 세력으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요시야 종교개혁의 내용과 진행을 살피면 당시 사회 정치적 집단들이 취했을 개혁에 대한 입장을 구분해 볼 수 있다. 요시야의 개혁에 동참하여 그 변화의 수혜를 입은 집단들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왕의 명령을 받아 개혁의 일들을 수행한 서기관들과 관료들, 훌다를 위시한 예언자들과, 사회 경제적인 중앙 집중의 혜택을 받는 예루살렘 거민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위치시킬 수 있는 집단으로는 이방 제의 제사장들과, 강제로 그 직임을 빼앗기거나 거주지를 옮기게 된 지방 성소의 제사장들, 그리고 지방의 조세경제적 흐름을 예루살렘으로 변화시킴에 따라 해임된 지방의 재정 담당 관리들과 상대적인 박탈감을 가지게 된 지방 거주민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들이 갖는 입장과 손익에 따라 각각 요시야의 개혁에 찬동하거나 반동하는 세력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당시 유다의 사회 속에서 특별히 주목할 집단은 ‘암 하아레츠’이다. 유다의 왕위 계승에 수차례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암 하아레츠는 사회 경제적인 구조 개혁을 수반한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그들의 국가 주도권과 기득권이 위태롭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요시야는 더 이상 섭정이 필요한 소년이 아니었다. 결국 암 하아레츠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회 정치적 권력으로 인해 요시야의 개혁을 반대하는 여러 집단들이 그들 주변에 모여 개혁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나아가 요시야의 개혁은 북왕국의 주민들까지 –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유민이든지 아니면 북쪽에 남은 사람들이든지 – 포괄하는 개혁이었다. 고고학적인 증거에 의하면 주전 8-7세기 예루살렘은 급속한 팽창을 경험하였다. 그로 인해 예루살렘으로 국가적 기능이 집중되었으며 예루살렘의 국가 수도적 의미가 강화되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국가적 인프라 재구축을 초래하게 된다. 이 변화의 주된 요인은 북 왕국이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 후 많은 유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정착하였으며, 유다, 특히 예루살렘 주변은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경험하게 된다. 히스기야 시대부터 시작된 일련의 개혁들, 즉 산당의 폐지와 예루살렘의 강화, 그리고 남쪽과 북쪽의 전승을 통합하는 연합 왕국에 대한 역사 재서술은 북왕국 유민들의 남왕국 거주와 남북 간의 하나됨을 공고히 하려는 수단이었다.
또한 요시야의 개혁이 북왕국의 제의 중심지에서 실행되면서 여로보암(왕하 23:15)과 북이스라엘 왕들(왕하 23:19)의 죄를 강조하는 데, 이것은 북 왕국의 주민들에게 요시야가 신명기적 정신에 충실한 이상적인 왕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옛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을 향한 요시야 자신의 정치적이고 종교적 입지를 위해 중요한 일이었다. 요시야의 개혁과 북 이스라엘 지역의 긴밀한 연관성은 이후의 신학적 흐름에서도 드러난다. 박혜경은 에스겔 37:15-28의 분석을 통해 요시야의 개혁이 통일된 왕조에 대한 에스겔의 열망에 있어 역사적 전거로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요시야의 개혁은 남과 북의 정치적, 종교적 통일성을 추구했고, 이것이 에스겔에서 상징화된 두 나무가 하나로 합쳐지는 것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민족적 통일이라는 먼 지평까지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해도, 신명기 신학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 북 이스라엘 지역은 요시야 종교개혁의 우호적인 지지 세력으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충분한 곳이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기억할 것은 언약책에 따라 종교적인 계약을 맺기 위해 백성들을 모은 자가 대제사장이나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요시야 자신이라는 점이다(왕하 23:1). 요시야는 개혁의 과정에서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유다의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주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한 후에 발견한 ‘언약책’의 내용을 읽고 그것을 따르기로 약속한다(왕하 23:1-3). 중요한 것은 이전에 율법책으로 표현된 것이 언약책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이 언약을 통해 요시야는 개혁의 확산과 협조를 약속받는다. 결국 다른 사람이 아닌 요시야를 중심으로 개혁을 향한 사회적 세력들의 이합집산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당연하게도 그의 개혁의 성패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 기사가 증거하듯이 요시야 개혁의 성공은 일시적이었다. 개혁이 시작되고 십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요시야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고, 그의 개혁 역시 멈추게 된다(왕하 23:29). 요시야 개혁 이전의 정치 사회 체제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을 암 하아레츠는 필시 요시야의 개혁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들의 지지를 힘입지 못했던 요시야의 개혁은 그의 정상적인 왕권의 행사에까지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요시야의 죽음 이후에 다시 등장한 암 하아레츠는 요시야의 큰 아들인 여호야김이 아닌 둘째 아들 여호아하스를 유다의 왕으로 세운다(왕하 23:30). 이 보고는 요시야가 진행한 개혁과 관련된 집단들 중에서 궁극적인 승자가 누구인가를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결국 요시야의 죽음과 함께 유다의 국가 개혁과 부흥은 그 걸음을 멈추게 되고, 이후 유다는 왕국의 쇠퇴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요시야의 사회 집단들에 대한 포용과 포섭의 한계가 곧 그의 개혁의 한계가 되었던 것이다.
4. 나가는 말 – 요시야 종교개혁의 시사점 및 제언
우리는 세계 역사에 유래를 찾기 어려운 급속한 기독교의 성장을 경험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성장 이후의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내고 있다. 이 혼란의 시기에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필요한 과업이라면 구약성경은 그 개혁을 향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본 논문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높고 성공적으로 평가받는 요시야 종교개혁의 내용과 특징적인 요소들을 살피면서 이 대답을 찾으려 했다.
첫째로 요시야는 개혁의 동력이 될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율법책이었다. 요시야는 백성들이 공감할 절차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담아 이 율법책을 내놓았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바로 성서였다. 당시의 정신 사조인 르네상스의 표어 ‘근원으로(ad fontes)’에 발맞추어, 기독교의 근원인 ‘오직 성서(sola scriptura)를 주장한 개혁자들은 라틴어가 아닌 세속어로 번역된 성서를 내놓으며 그들의 신앙과 종교적 이상을 담아내었다.
오늘의 한국 교회와 신학은 이와 같은 기준이 필요하다.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하다가도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성서에 대한 존중과 확실한 자리가 있는 한국 교회의 유산은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유산 위에서 성서적인 기준의 분명한 확립을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서에 기준한 공통의 신념을 세워갈 수 있다면 이 시대를 향한 요시야의 율법책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요시야는 여러 사람들을 끌어안았다. 그는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 여러 사회적인 집단들을 포용하고 포섭했다. 비록 한계가 있었지만 요시야와 함께 한 이 집단들이 없었다면 그의 개혁은 성공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가 더욱 다양하고 다원화 된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우리가 개혁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이것은 더욱 중요하고 필요한 요소이다. 돌이켜보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를 앞선 얀 후스와 사보나롤라와 같은 개혁자들과 달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개혁을 지지하고 추종했던 농민들과 영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교회가 가진 높은 자긍심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사회와 단절되고 고립된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개혁의 꿈은 요원할 것이다. 포용하여야 한다. 그리고 필요하면 포섭하여야 한다. 요시야에게 있어 포용과 포섭의 한계가 그의 개혁의 한계가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졌다. 라일리(William Riley)는 구약성경의 중요한 주제인 성전 제의가 요시야의 통치 기간 중에 완성되었다고 파악하며, 동시에 이 기간이 다윗 왕조가 끝나는 시작점으로 파악한다. 요시야가 성전 제의를 완성하며 다윗 왕조의 절정의 시기를 이루었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마지막으로 요시야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셋째로 요시야는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백성들과 언약을 체결했다. 이 언약은 요시야의 개혁에 대한 협조의 약속이었다. 이미 일어난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요시야의 대비는 주효했다. 산당과 여로보암의 죄는 열왕기서에서 왕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 일관되며 주요한 주제이다. 요시야의 개혁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말하자면 요시야는 신명기대로 그의 개혁을 행한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요시야가 신명기의 기준이 되었고 그의 후세에 전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요시야로부터 이천 오백년 이상이 지난 현재에도 그의 종교개혁은 여전히 구약성경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사건이 되었다.
개혁은 장기간의 과업이다. 긴 시간을 볼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대비이다. 당장의 개혁을 위한 사업들의 성패도 중요하지만 계속 이어갈 미래에 대한 대비가 없다면 그 개혁은 종국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개혁에 급급할 것이 아니라 긴 시각을 가지고 미래를 위한 준비에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요시야 시대의 종교개혁과 같이 당장은 실패나 일시적인 성공으로 평가된다고 하여도 시간은 그 평가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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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종교개혁과 교훈”에 대한 논찬
정 일 승 박사 (건신대학원대학교)
논문의 구성 및 주요 내용
이동규 박사님(이하 연구자)의 논문은 구약성서에서 종교개혁으로 불릴 만한 여러 개혁 시도들 가운데 요시야에 의한 개혁의 특징과 그 역사적 배경을 분석한 것으로, 이를 통해 교회와 신학이 이루어가야 할 변화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연구자는 논문의 본론을 크게 두 부분으로 간결하게 나누어, 요시야 종교개혁 당시의 정황 및 개혁의 여러 요소와 주요 특징에 대한 논증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첫째, 본 논문은 열왕기하 22-23장에 대한 구조분석과 함께 요시야가 왕으로 즉위하던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국내외 역사적 정황을 소개한다. 선왕의 암살 및 자연스럽지 않은 즉위 과정, 그리고 국외에서는 이집트의 26왕조가 세력을 확장하고, 아시리아의 쇠퇴와 함께 바빌로니아가 세력을 확대하는 외교적 혼란의 시기 가운데 요시야의 개혁이 이루어졌음을 언급한다. 요시야의 개혁에는 종교적인 내용이 주로 나타나지만, 그 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또한, 연구자는 개혁과 요시야 왕에 대한 열왕기하, 역대기하, 제1 에스드라서의 긍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실제 역사적 사실은 이 평가에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p. 11), 유다 멸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왕하 23:26-27)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둘째, 연구자는 ‘요시야 종교개혁의 요소와 특징’으로 율법책이 개혁의 기준과 방향이 되었으며, 요시야의 개혁이 정치, 사회, 경제적 변화를 망라하는 전국가적 개혁이었음을 강조한다. 성전 보수 중에 발견된 율법책은 요시야의 개혁을 추진하는 동력이 된다. 율법책의 존재 여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연구자는 히타이트 제국의 무르쉴리 2세의 기록, 이집트 멘투호텝의 석관에서 발견된 ‘사자의 서’ 서문, 바빌로니아 나보니두스의 기록을 소개하면서, 고대의 문서를 발견하여 이를 근거로 진행되는 요시야의 개혁의 과정과 유사한 일련의 활동과 과정을 고대 근동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요시야가 율법책의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예언자 훌다를 통해 신탁과 신적 명령이 주어지고, 이어서 여러 계층들과 담화를 통해 개혁을 추진하는 일련의 과정이 고대 근동의 왕들의 개혁적인 정책(예 – 느부갓네살 1세, 산헤립, 나보니두스)의 단계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다.
요시야의 개혁이 종교 개혁에서 확장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의 개혁이라는 점을 논증하기 위해 연구자는 몇 가지 핵심 근거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연구자는 요시야의 개혁이 율법책의 발견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역대기의 기록은 요시야의 개혁이 종교개혁 이상의 목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p. 16). 성전 보수의 내외부적인 진행도 종교적 측면을 넘어서 왕실의 정치적 활동의 일부였으며(p. 16-17), 산당의 타파 역시 종교적 정결 보다는 예루살렘으로의 제의 집중의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p. 17). 연구자의 주장에 의하면, 제사장 제도의 개혁 역시 단순한 종교적 직무의 재편이 아니라, 제의, 사법, 교육 등 기존 정치와 권력구조의 개편을 의미한다(p. 18-19).
본 논문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전국가적 개혁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를 둘러싼 세력의 구분이 드러났다고 주장한다. 요시야의 개혁과 그 변화의 수혜를 입은 집단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관료, 그리고 훌다를 위시한 예언자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집단으로 이방 제의 제사장들, 지방 성소의 제사장들, 재정 담당 관리들과 거주민을 제시하였다(p. 20-21). 또한, 요시야의 개혁이 북이스라엘 지역 및 북왕국의 주민들(또는, 남쪽으로 내려온 유민)까지 포괄하는 개혁이었으나, 요시야 개혁 이전의 가장 강력한 집단이었을 ‘암 하아레츠’를 포섭하지 못한 것이 결국 요시아 개혁의 한계와 실패로 귀결되었다고 주장한다.
결론에서 연구자는 이와 같은 요시야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 및 주요 내용을 교훈으로 삼아, 한국교회와 신학의 변화를 위해 개혁의 동력인 성서에 기준한 공통된 신념, 여러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 그리고 현 시대의 개혁뿐만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는 협조의 약속이 필요하다고 권면하였다.
논평 및 제안
이동규 박사님의 연구는 요시야의 종교 개혁의 역사적 배경 및 주요 특징을 구약성서 이외에도 근동의 자료와 함께 비교하면서 분석한 것이다. 연구자는 단순히 구약성서 본문에만 근거하여 주해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텍스트를 둘러싼 주변의 다양한 종교적,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배경을 추적하면서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둘러싼 다채로운 역사적 정황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다. 논문의 명확한 문체와 명료한 내용 전개는 독자로 하여금 요시야의 종교개혁 전반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짚어볼 수 있게 한다. 또한, 연구자가 지닌 고대 근동에 대한 지식 및 다양한 학자들의 축적된 연구성과가 충실히 반영되어 논지를 전개한다는 측면에서 논리적 명확함이 돋보이는 논문이다.
다만, 연구자가 논문에서 종종 추측성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 재구성의 영역은 있을 법하지만, 실증적 증거보다는 역사적, 문헌적, 고고학적 자료로부터 도출한 개연성에 근거한 추론에 머물 수밖에 없는 한계도 보인다. 논문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고려할 사안 및 본 논문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위해 몇 가지 질문과 제안을 드리고자 한다.
1. 열왕기하 22-23장에 기술된 요시야의 개혁의 구체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학문적 논의가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본 논문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상황과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였으나, 그 개혁이 정작 필요했던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당시 국내외 정황을 배경으로 요시야의 개혁을 설명하지만, 개혁의 구체적인 동기에 대한 연구자의 견해가 좀 더 보완되면 논문의 구성이 더욱 정교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2. 연구자는 요시야의 개혁이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 남쪽으로 내려 온 많은 유민들과 북쪽에 남은 사람들까지도 포괄하는 개혁이라고 주장한다(p. 21). 그러나, 북이스라엘 난민이 예루살렘으로 피난하였다는 가설은 구약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직접적인 근거인 구약성서는 북이스라엘 난민의 유입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본 논문에서는 홍국평 박사의 논문 “북이스라엘 난민 유입 가설 재고”를 각주에 간략히 언급했지만, 홍국평 박사는 오히려 ‘북왕국 난민 유입 가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학계의 흐름에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멸망에 단초를 제공한 앙숙의 품으로 제 발로 들어왔을 것인지, 아시리아의 봉신으로 전락한 유다가 반역 행위나 다름없는 이스라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을 것인지, 소규모 도시인 예루살렘이 대규모 난민의 갑작스런 유입을 감당할 수 있었는지 등, 북왕국 난민 유입 가설에 대한 여러 반론을 고려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3. 연구자는 율법책의 권위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했던 예언자들인 예레미야나 스바냐가 아닌 생소한 인물, 특별히 여자 예언자를 내세운 것이 본문의 내용에 대한 신뢰성을 높여준다고 주장한다(p. 14). 그러나, 그 근거가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인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훌다라는 여선지자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22장과 역대하 23장에 기록된 정보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오히려 공식적인 예언자들을 내세우는 편이 신뢰성의 검증이라는 측면에서 더 효율적이진 않은가? 이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예레미야나 스바냐가 언급되지 않고, 요시야의 개혁에 가담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 대해 연구자의 견해가 제시되는 것도 좋겠다.
4. 본 논문에서 ‘그 땅의 백성’(עַם־הָאָרֶץ 암 하아레쯔)의 정체 및 요시야의 개혁과의 관계는 각주(51번)에 간략하게 연구자의 선행 연구를 간략히 명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본론의 내용으로 더 포함시켜야 할 핵심적 논의로 생각된다. 연구자는 요시야의 개혁과 ‘암 하아레쯔’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을 취하는데, 반대 견해와의 비교 분석이 제시되는 것도 독자에게 유익할 것이다.
5. 연구자는 요시야 종교개혁의 시사점을 제시하는 결론에서 요시야가 개혁의 성공을 위해 여러 사회집단을 포용하고 포섭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p. 21-22), 이는 사회 집단들에 대한 포용과 포섭의 한계가 그의 개혁의 한계가 되었다는 본론의 진술과는 상충되는 것 같다(p. 23). 요시야가 포섭하지 못했던 대표적인 집단으로 ‘암 하아레쯔’가 언급된다. ‘암 하아레쯔’를 포용 또는 포섭하지 못한 것이 요시야 개혁의 실패 원인이고, 결국 ‘암 하아레쯔’가 정치 권력의 세계에서 최후 승자가 되었던 것인가? 갑작스러운 죽음과 기존 정치권력의 지지를 얻지 못해 일시적인 개혁에 머물렀던 요시야의 모습은 우리에게 오히려 좌절감을 안겨주는 것은 아닐까?
논문의 발전 및 토론을 위해 고려해볼 수 있는 점을 제시하였으나, 이동규 박사님의 논문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역사적 배경을 면밀하게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구 주제와 관련된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성실히 반영한 흥미롭고 유익한 논문이다. 귀한 논문으로 역사비평의 유익을 상기시켜 주신 이동규 박사님께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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