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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9)/영국의 종교개혁가 위클리프 > 한상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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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9)/영국의 종교개혁가 위클리프 > 한상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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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9)/영국의 종교개혁가 위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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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0-09-2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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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문제에 대한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최고 권위는 무엇인가? 중세 교인들은 최고의 권위를 흔히 교황에 두곤 했다. 그러나 중세 후반에 들어가면 교황권은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되었고, 교회의 분열과 교황의 난립으로 교황은 유일하고 최고의 권위가 되지 못했다.


1. 성경과 교황권에 대한 견해


1) 성경의 권위

위클리프는 1378년 ‘성경의 진리’를 저술하였다. 그는 성경에 오류나 모순이 없으며,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담고 있으므로 교회의 전통이나 교황이나 다른 어떤 가르침을 보충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전통이나 교회법, 공의회, 교황 같은 권위들이 성경에 의해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성경이 모든 가르침의 궁극적 기준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히 종교개혁가들의 입장을 미리 언급한 것과 같았다. 그는 성경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책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제자들이 이러한 영향을 받아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은 확실하다.

 

2) 교황권에 대한 비판

1379년 그는 ‘교황의 권력’이란 저서에서 교황직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 의해 제정된 직분이라고 했다. 나아가 교황권은 교회에 국한되며, 세속 정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교황은 적그리스도이며, 나중에는 교황제도 자체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비판으로 당시 로마 교회는 위클리프를 핍박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제자들은 더욱 큰 박해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확산되어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 온 보헤미아 사람들이 위클리프의 사상을 펼쳐갔고, 나중에 후스가 그의 영향을 받았으나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했다.


2. 생애와 평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는 영국 요크셔의 지주 가문에서 태어났다. 18세에 회심한 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해서 137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1374년 교황이 납세 문제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를 불렀을 때 위클리프도 사절단으로 따라갔다. 그 후 그는 로마 교황청의 부패를 탄핵하기 시작하였다. 1378년 위클리프는 공직에서 벗어나 대학에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주교들은 대학 당국에 그의 급진적인 사상을 저지하도록 압력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381년 농민폭동이 일어나 그는 부재교구 사제의 자리로 돌아갔다. 거기서 몇 년간 저술에 몰두하다가 그는 뇌일혈로 쓰러졌고 루터워스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오늘날 개신교인들은 존 위클리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옥스퍼드 대학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인 위클리프 홀과 세계 성경번역 선교회가 있다. 그의 추종자들인 롤러드파(Lollards)는 성경을 번역하고 널리 보급함으로써 그의 사후 150년이 지나서 영국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길을 닦아놓았다.


3. 종교개혁의 기초가 된 신학사상


1) 종교개혁의 새벽 별

위클리프는 공인된 가톨릭 신조에 의문을 표하는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는 화체설을 거부했다. 그는 성만찬 때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어떤 의미에서 현존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체설의 교리처럼 빵의 물리적 특성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실제는 변화된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떡과 포도주가 성만찬에 봉헌된 후에도 그대로 존속한다고 믿었다. 다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상징적 요소가 된다고 했다.

 

2) 급진적인 통치권 사상

1370년 옥스퍼드의 지도적인 철학자와 신학자가 된 위클리프는 ‘시민통치’라는 저서에서 통치권에 대한 급진적인 사상을 전개하였다. 그는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공유함으로써 우주의 모든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위임받은 권한을 어기고 있으므로 더 이상 소유권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불의한 통치자들의 소유재산에 대한 몰수가 정당하며, 특히 타락한 성직자들의 재산을 정부가 몰수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당시 영국교회는 전 토지의 3분의 1을 소유했으나 면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영국 왕이 전쟁의 비용을 마련하거나 교황과 협상을 벌일 수 있는 좋은 이론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들은 교황은 일련의 교서를 통해서 그의 주장을 정죄하였다. 하지만 1378년 다른 교황이 선출되고, 이후 교황들이 서로 다투는 바람에 그는 큰 화를 당하지 않았다. 그가 시골 교구로 물러난 후에야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로부터 이단이라고 정죄되었다.

 

3) 사후에 화형당한 개혁사상

1428년 교황은 위클리프의 성경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무덤에 안치된 위클리프의 유해를 무덤에서 다시 파내어 공중 앞에서 불태웠다. 그들은 그의 뼈를 태운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렸다. 훗날 역사가는 말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사상은 정죄되었고 그의 시신을 불태워졌다. 그 재는 스위프트 강에 뿌려졌다. 스위프트는 그 재를 아본 강으로, 세번 강으로 전달해주었다. 세번 강은 좁은 바다로, 좁은 바다는 대양으로 그것을 확산시켰다.” 그의 사상은 죽은 후에도 계속 퍼져나갔고, 종교개혁 정신의 한 기초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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