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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 (5) / 십자군 전쟁 > 한상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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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인 목사

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 (5) /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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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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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 중의 하나가 십자군 전쟁이다. 이 전쟁은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서유럽 국가들과 이슬람 세력 사이에 일어났다. 십자군이란 명칭은 유럽의 원정군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 모양의 마크를 새겨넣은 것에서 유래한다.


1. 십자군 전쟁의 역사적 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가 발흥한 후, 기독교 영향권에 있던 동유럽과 소아시아가 이슬람교 세력에 의해 점령되기 시작하였다. 7세기 전반에는 시리아와 이집트, 7세기 후반에는 아프리카 북부, 그리고 8세기 전반에는 스페인이 정복되어 서유럽 기독교 세계가 위기를 느끼고 불안해하였다. 동방에서는 셀주크 제국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후 예루살렘 지역까지 점령했으나 동로마제국이 막을 수가 없었다.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우스 1세(1056-1118)는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원조를 받을 수 있도록 로마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로마의 역대 교황들은 그리스 정교회가 관할하는 지역을 되찾아 기독교를 다시 통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에 종교 회의를 열어 기독교 국가들이 연합해 이교도가 활개를 치는 성지를 되찾는 위대한 전쟁을 치르자고 주장했다. 그는 또 원정에 참가하는 사람은 모든 죄를 사면해 준다고 선포했다. 이러한 종교적 동기 외에도 유럽의 많은 기사들이 모험심과 영토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십자군에 참여하게 되었다.


2. 십자군 전쟁의 진행


십자군 전쟁은 제1차 1096년부터 1291년 제8차에 이르기까지 200년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1차 십자군 전쟁(1096-1099)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주도로 승리하여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라틴국가를 수립하였다. 2차 십자군 전쟁(1147-1149)은 1144년에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독일 황제 콘라트 3세가 참전하였으나 패배했다. 3차 십자군 전쟁(1189-1192)은 예루살렘이 정복당하자, 프리드리히의 황제와 영국의 리처드 1세, 프랑스의 필립 2세가 참전했으나 탈환에 실패했다. 4차 십자군 전쟁(1202-1204)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독려로 시작되었으며,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지 않고 비잔틴으로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제국을 세웠다.

 

5차 십자군 전쟁(1217-1221)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군대가 참전했으나 탈환하지 못했다. 6차 십자군 전쟁(1228-1229)은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참전하여 외교 전략으로 예루살렘과 나사렛, 베들레헴을 10년간 양도받았다. 7차 십자군 전쟁(1248-1254)은 프랑스 루이 9세가 소년과 소녀들을 참여시킨 전쟁으로 소년십자군이라고 한다. 8차 십자군 전쟁(1270년)은 루이 9세가 사망함으로써 탈환에 실패했다. 십자군 원정은 십자군의 마지막 요새인 악고(Acre)가 1291년 함락됨으로 끝나게 되었다.


3. 십자군 전쟁의 평가와 영향


1) 패배한 전쟁

십자군 전쟁은 실패한 기독교 운동이며 패배한 전쟁이다. 본래 십자군은 일시적으로 승리할지라도 성지를 방어할 만큼 숫자적으로 방대하지 못했다. 교황에게 지휘권이 없으므로 군사력을 통일시키지 못했고, 군사 지도자들의 탐욕과 이권에 대한 욕망으로 단결이 되지 않았으며, 지리적으로 미숙하여 승리하기 어려웠다. 

 

2) 정치적 변화

오랜 기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서유럽 봉건 영주의 몰락과 왕권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에 동원된 농노들이 대거 장원으로 돌아오지 않으면서 농노제의 몰락이 가시화되었다. 귀족 계급의 몰락은 왕권이 급속하게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작하지 않는 방대한 영주들의 토지가 모두 국가에 귀속되게 되었다. 왕권이 강화된 대표적인 나라는 영국과 프랑스 등이다. 

 

3) 경제적 변화

원거리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상업이 발달했으며, 전체적인 경제력이 향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동 지역의 옷감과 음식, 향료들이 서유럽으로 전파 되었으며, 이런 물품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무역이 이루어졌다. 원정대가 오가던 길목에 위치했던 도시의 도시민들과 상인 계층의 지위가 향상 됐다. 항구도시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십자군 전쟁을 인하여 금과 은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서유럽의 화폐 경제가 활성화되었고,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4) 종교적 변화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종교적인 변화이다.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권위와 교회의 위상이 실추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전쟁은 기독교의 도덕적 기준을 타락시켰으며, 지식 없는 신앙과 무모한 용기, 무분별한 헌신이 고귀한 기독교 사랑의 정신을 훼손하였다. 십자군은 약탈과 살인, 무질서와 잔인성으로 원주민들에게 엄청난 반감을 샀다. 특히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므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혐오증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남아 있다. 나아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사이에 큰 상처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사이에 깊은 증오심을 낳게 하였다. 십자가 이름 아래 치러진 거룩한 전쟁은 사실상 인간의 탐욕의 전쟁에 불과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선교의 장벽을 높이 쌓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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