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지성 아우구스티누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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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단과의 논쟁
1) 마니교
어거스틴은 진리와 무관하게 남을 설득하는 기술을 익히는 수사학보다 진리를 말하는 수사학자가 되기 위해 마니교를 찾았다. 그는 한때 마니교를 통해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 악의 문제에 대해 깊은 사색을 하였다. 그러나 마니교에서는 신앙을 문화인과 지성인의 가치없는 활동이라고 조소하였다. 그들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만을 신뢰하였다. 어거스틴은 신앙은 이성보다 열등하지 않으며, 참된 신앙은 결코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신앙은 모든 인식의 활동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단계로 여겼다. 그는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나중에 그는 악의 존재는 선신이 악신을 물리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마니교의 주장은 피상적임을 알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오직 한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가 천사나 인간에게 오용됨으로써 악이 나타나게 된 것으로 여겼다. 그는 자기가 잘못 인도하여 마니교에 빠진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 마니교에 대한 비판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2) 펠라기우스주의
영국의 수도사인 펠라기우스는 로마에서 지중해 전역을 여행하면서 아담의 원죄는 단지 아담에게만 영향을 미치고 인류 전체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원죄를 부정하고 유아들은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지 않으며 무죄하게 태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인간은 원죄와 타락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반박하였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인간의 구원이 거룩한 은혜, 즉 하나님의 선물임을 부인하였다. 어거스틴은 신앙의 시작과 성장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반박하였다.
3) 기타
약 312년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도나티즘은 디오클레티안 박해 동안 몇몇 기독교지도자들이 살기 위해 성경의 사본들을 정부에 바친 것을 비판하면서 발생했다. 그들은 배반자들의 성직을 박탈해야 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따로 세우게 되었다. 80년이 지나 어거스틴이 감독으로 있을 때, 결국 정치적 교권적 싸움이 되어 도나투스파를 정죄하고 소멸시키게 되었다.
한편 회의주의자들은 인간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하다. 어거스틴은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 것도 모른다는 회의주의는 거짓이 된다.
4. 하나님의 은혜
1)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며 최고선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인간은 정적인 존재가 아니어서 하나님과 반대방향으로 간다. 인간 조상의 타락은 인간의 행동 방향을 하나님과 정반대로 바꾸어놓았다. 인간은 이런 원죄로 인해 그 의지가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자신이 아무리 원한다 할지라도 영원을 향해 그의 의지를 돌이킬 수 있는 능력이나 자유가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시간의 세계로 자꾸 떨어질 뿐이다. 인간은 실존적 탄식과 절망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세 가지로 임한다. 첫째로, 그의 세계 창조와 보존에 나타난다. 세상만물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고 무(無)로 환원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혜의 증거이다. 둘째로 하나님 은혜의 사건은 말씀의 성육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성육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증거인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 은혜의 역사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사랑으로 부어주시고, 또한 새롭고 선한 의지를 재창조해주시는 역사이다. 이와 같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내재로 인하여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때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 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현재 여기(here and now)에서도 영원을 체험하게 된다. 어거스틴이 말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단맛’은 신비한 영적체험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는 사랑이란 인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2) 종말의 대망
그리스도인은 ‘영원을 이미 체험한 삶’(already experienced)과 ‘아직 충분히 체험하지 못한 삶’(not yet experienced fully) 사이에서 종말의 완성을 대망하며 살고 있다. 인내의 은혜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역사 안에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현재 체험한 영원은 미래를 약속하는 보증이요, 미래를 미리 맛보는 체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미래의 영원을 향해 소망을 가지고 순례를 계속할 수 있다.
나가는 말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는 어거스틴의 영성의 샘에서 천년의 지성이 흘러나왔다. 그 지성의 샘물은 개신교의 은혜와 믿음의 기반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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