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교부 암브로시우스와 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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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년에서 590년에 이르는 니케아 시대는 박해가 끝나면서 믿음의 근본에 대한 논의가 왕성해진 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가, 사람이신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한분이신가, 세분이신가?” 당연히 신학자들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중에서 라틴교회의 4대 교부들인 암브로시우스와 제롬이 출현하였다.
설교가요 행정가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39-397년)는 오늘날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로마의 귀족으로 갈리아 지방의 총독이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로마에서 아버지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뛰어난 법률가로 성장하였다.
그는 370년경 총독이 되어 밀라노에서 살았는데, 아리우스파와 갈등을 겪는 교회를 중재하다가 뜻하지 않게 주교로 임명되었다. 주교가 된 암브로시우스는 오래지 않아 당대의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는 최신의 지식과 사상을 다양하게 섭렵하였으며, 설교할 때 그것들을 토대로 성서를 해석하고, 구약성서의 영적인 뜻을 이해시켰다. 그의 설교들은 라틴 웅변의 걸작들로 인정받았고, 그의 설교들을 통해 변화된 가장 유명한 개종자 아우구스티누스였다.
또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사회사업에도 열심을 내었으며, 라틴 지식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고전 라틴어로 번역하여 알게 해주었다. 그는 새로운 동방 음악을 도입하고 여러 찬송가를 작곡함으로써 라틴 찬송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기독교적 관점을 처음 언급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중세 기독교의 황제를,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는 황제‘로서 주교의 조언을 따르는 교회의 충성스러운 아들로 정립하였다. 그는 교회의 국가에 대한 행정적 권위를 강화했다. 384년 로마 원로원에서 이교도들이 항소한 '종교 관용령'이 거부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아리우스파를 반대해서 그들이 교회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385년에는 발렌티아누스 2세의 황태후인 유스티나가 이단 아리우스파에게 교회를 넘겨주려고 하자, 암브로시우스는 신도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황제의 군대에 대항하며 맞섰다. 특히 그는 유대인 회당을 불태운 주교를 처벌한 황제 데오도시우스를 비판했으며, 390년 데살로니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황제가 그곳 주민들을 학살한 것을 공개적으로 회개시켰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암브로시우스를 주교의 전형으로 보았고, 펠라기우스는 그를 '라틴 웅변의 꽃'이라고 말했다. 암브로시우스는 397년 4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눈을 감기 전에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어찌 이리 많이 남았단 말인가! 오, 주여! 어서 빨리 오소서! 지체하시지 마시고 저를 거절하지 마옵소서” 라는 말을 남겼다.
신성한 사람 제롬(Jerome, 331-420년)은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번역자로 잘 알려져 있다. 양친 모두 무척 부유하였고 기독교인이었으나, 제롬이 어릴 적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다. 354년경 그는 로마에서 수사학과 고전문학을 공부하며, 로마의 전통적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중병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자 하나님의 징벌이 내린 것으로 생각하고 비로소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되었다. 그 후 갑자기 병이 치유되었으며 그로 인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360년에 세례를 받았고, 370년경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와 수사가 되었다. 그는 뛰어난 기억력과 확실한 사랑과 미움의 감정,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날카로운 언변과 정열적인 기질, 박학다식의 오만함으로 인해 남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번역과 주석, 기타 학술저서를 통해 서방 기독교에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흔히 상체를 벗은 은수자로서 펜을 들고 저술에 몰두하거나, 돌로 가슴을 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제롬은 373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 안디옥으로 건너가서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우스 주교에게서 성경 주석 방법과 헬라어를 배웠다. 당시 열병을 앓고 있었던 그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본 후 완쾌되었다. 그 후 안디옥 동쪽의 광야로 가서 많은 은수자들과 더불어 4년 동안 기도와 고행, 공부에만 힘썼다. 그런 가운데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만나 히브리어를 공부하여 완숙한 경지에 올랐다. 그의 성격 때문에 수도생활에서 다른 은수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다가 결국 로마로 돌아왔다. 교황 다마수스 1세는 그에게 성서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게 했다. 그러나 그가 교회를 비판한 것으로 인해 로마에서 팔레스타인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55세 무렵에 수도원을 설립했으며, 거기에서 은둔생활과 지적활동을 겸한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다. 391년부터 406년까지 끈질기게 집필을 계속하여 마침내 불가타역을 75세 무렵 완성하였다.
제롬의 공헌을 두 가지로 압축하면, 라틴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불가타역)과 수도원 운동을 촉진시킨 점이다. 그는 기독교적 키케로, 즉 포괄적 기독교 문화의 교사와 모델이기를 바라는 동시에 거룩한 수도자이기를 소원하는 갈등을 겪었다. 그는 150개의 서신집을 남겼는데, 그것은 그 자신과 당시 사회역사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특히 ‘펠라기우스를 반박하는 대화’에서 그는 가공의 질문자들을 등장시키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죄 짓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원죄와 은혜의 교리를 주장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동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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