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기 교부들의 신학과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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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는 기독교회의 박해가 끝나고 로마제국에 의해 공식종교로 인정받은 때이다. 밀비안 다리의 전투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기독교는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받았다. 그 후로 기독교는 정치적 갈등에 연관되었고, 외부적인 이단보다는 내부적 신학논쟁으로 분열과 핍박을 받는 니케아 시대가 된다.
정통신앙의 수호자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년)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했다. 328년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 되어 사망할 때까지 해임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그는 추방되었을 때 그는 광야의 수도승들에게 가서 집필에 몰두하였고, 마지막 귀환한 후 알렉산드리아에서 소천했다. 그는 삼위일체론에서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인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 신앙을 수호했다(빌 2:6). 또한 기독론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화롭게 된 피조물이 아니라 육체를 입은 하나님이며, 그리스도는 신성의 모든 특권을 본유적 권리로서 발휘할 수 있다고 하였다(요 1:14). 그는 유형기간에 광야의 적막함과 영적 정치적 긴장감으로 인하여 비상한 영감이 떠올라 많은 작품을 썼다. ‘아리우스주의 반박론’과 ‘안토니의 생애’ 등을 저술했다.
안토니(251-356)는 105세를 산 은자로 애굽 광야에서 고독을 추구한 은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저서를 통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수도 생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도록 권고하였다. 그는 광야의 고독이 그리스도인의 영성 개발에 지극히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Pamphili, 약 260-339년)는 4세기에 팔레스타인 가이사랴 지방에서 활동한 주교요 변증가, 역사가이다. 그가 명성을 얻은 이유는 ‘교회사’ 때문이다. 이 책은 초기 교회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데 큰 가치가 있다. 가이사랴에서 세례와 성직임명을 받은 뒤 학자이자 장로인 팜필리우스에게 배웠다. 스승이 순교한 후 이집트에 갔다가 감금되었지만 고문을 받지 않고 석방됨으로써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총애를 받던 그는 새 시대의 변화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그리스도교적 제국론을 주장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통해 그리스도 왕국이 지상에 도래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단 아리우스와 연합하여 정죄된다. 비록 그가 아리우스를 반대하는 니케아 신조에 서명했지만, 그는 반아리우스파(semi-Arians)였다.
삼위일체론의 대 바실(Basil the Great, 330-379년)은 갑바도기아의 저명한 기독교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겨우 10세밖에 안된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유학을 보냈고, 21살 때에는 아테네에서 수학과 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그는 누나 마크리나의 권면을 받고 고위공직자의 꿈을 버리고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금욕적 삶을 추구했던 바실은 밤새 기도하기도 하고, 한 가지 옷 이상을 입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발전시켰다. 주변의 권위로 도시로 들어와 목회사역을 하다가 370년 갑바도기아 가이사랴의 감독이 되었다. 당시 은자들은 광야에서 기도와 금식을 하면서 고립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대 바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고립된 금욕생활보다는 공동체 생활해야 한다고 믿고 수도원 공동체를 운영했다. 그는 수도승들이 거룩함을 경쟁하기 보다는 서로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수도승들의 사회적 임무를 강조했다. 교회 주변에 나그네들의 숙소와 병원, 나병환자들의 진료소와 학교, 구제기관 등을 세웠다.
그는 삼위일체의 정통 기독론을 수호했다. 특별히 그는 삼위일체의 성령 하나님을 강조했다. 피조물들의 창조와 중생, 성화에 관한 책임은 성령님께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신성을 소유하셔야 한다. 성령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성부와 성자를 믿는 신앙이 무용지물이다. 성령의 임재가 없이 그러한 신앙을 고수할 수 없다. 성령을 믿지 않는 자들은 성자를 믿지 않는 것이고, 성자를 믿지 않는 자들은 성부를 믿지 않는 것임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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