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4) / 가톨릭 반동과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종교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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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종교개혁이 진행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갈등이 유럽의 전역에서 만연되었다. 그러한 갈등이 여러 회담과 전쟁을 치루면서 점차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신앙의 자유는 아직 허락되지 않았으며, “아우구스부르크 잠정 협정”(1555년)에서 통치자의 관할 지역에서는 통치자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1. 로마 가톨릭의 종교개혁 반동
1) 로마 가톨릭의 개혁운동
로마 가톨릭교회의 반동종교개혁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전체적인 개혁 요구를 거부하고, 도덕적인 개혁만을 추구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종교 단체와 수도회를 통해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85㎞ 떨어진 소도시 아빌라에서 1567년 귀족의 딸인 데레사는 엄격한 규율을 적용한 맨발 가르멜회를 세웠다. 그녀는 영성문학의 고전인 ‘완덕의 길’, ‘영혼의 성’ 등을 저술했다. 그녀의 영향으로 이듬해 25세 사제 십자가의 요한이 맨발 가르멜 남자 수도원을 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수파의 반발로 맨발 수도회 소속 55명의 수녀가 파문당하고, 십자가의 요한이 동굴 지하실에 감금당하는 등 고난이 거듭됐다. 그러나 성녀 데레사는 20년 동안 스페인 전역에 남녀 수도원 17개를 세웠다.
2)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와 예수회
로욜라(Ignatius Loyola)는 원래 호색과 음주를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나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 참여해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입원해 있을 때, 성자들의 전기와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책을 읽고 헌신을 결심했다. 1539년 이교도와 빈민을 대상으로 일하며, 천주교회를 확장할 것을 목적으로 예수회를 조직하였다. 예수회는 16세기 후반에는 천주교 부흥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고, 반동 종교개혁의 전위대가 되었다.
3) 근대 가톨릭교회의 탄생
1545년 12월 트렌트 종교회의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의문을 제기하였던 신학의 전반적 문제를 취급하게 되었다. 교회의 개혁을 위한 몇 가지 칙령이 반포되었는데, 이는 근대 가톨릭교회의 탄생을 선포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중세의 논쟁적인 일부 문제들을 미결로 남겨 놓았지만, 종교개혁에 관한 사항은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또한 이교적인 전통을 옹호하였으며, 초대교회 때부터 인정하지 않던 외경을 정경으로 채택하는 등 반종교개혁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으로 잃은 땅을 선교를 통하여 회복하고자 하였다.
2. 프랑스의 종교개혁 운동
종교개혁 초기에 프랑스를 통치했던 인물은 프란시스 1세였다. 그의 아들 헨리 2세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였으나 개신교에 대한 그의 반대는 보다 지속적이고 잔인했다. 그의 네 명의 아들 가운데 셋이 연이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그들의 모친 캐더린이 섭정을 했다.
그런데 캐더린은 찰스 9세를 위해 반대파를 제한하기 위한 정치적인 책략으로 개신교인 위그노파를 지원했다. 그래서 1562년 성 저맨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싸움이 시작되었다. 1572년에는 개신교에 대한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찰스 9세에 이어 헨리 3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내분은 멈추지 않고 30년 동안 전쟁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헨리 4세(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파에게 파리를 제외하고 그들이 이전에 교회당을 소유하였던 모든 장소에서 자유스럽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1610년 앙리 4세가 암살당하고 그 아들 루이 13세가 9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다음으로 루이 14세(1643~1715)가 5살에 즉위하였다. 그가 22세가 되자 친정을 시작하였고, “짐이 곧 국가다”라고 천명했다. 루이 14세는 1715년 프랑스에서는 이제 프로테스탄트의 모든 종교의식이 종식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1787년에 이르러 위그노의 공민권이 부분적으로 회복되었으며, 1789년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국민의회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프로테스탄트에게 모든 관직과 직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3. 네덜란드의 종교개혁 운동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등의 저지대 국가들은 각 지역마다 특정 정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언어적 문화적 통일성도 없었다. 종교개혁의 다양한 전조적 운동으로 인문주의 개혁가인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활동했으며, 루터파 설교가들이 이 지역에 들어와 많은 숫자를 개종시켰으며, 재침례파들도 대대적으로 유입되었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칼뱅주의 설교가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결국 칼뱅주의 설교가들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 지역의 주류는 칼뱅주의가 되었다. 그 중에서 17세기가 나은 화란 개혁교회의 대표적 신학자인 푸치우스(G. Voetius)는 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경건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경건이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성도들이 행하는 모든 합당한 행동들을 다 가리키고 있다고 했다.
이제 유럽은 점점 여러 기독교 교파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저지대 지역에서는 종교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개신교인 네덜란드와 로마가톨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등 세 국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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