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운동(11) /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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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당시의 라틴 가톨릭교회는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졌다. 물론 그 때에도 동방의 기독교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기독교는 크게 3대교회로 나눠지게 된 것이다.
1. 마르틴 루터의 생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슬레벤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사이에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로 성공시키려고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루터가 22세 때 집에서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에 무시무시한 벼락이 바로 옆에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수도사가 되기를 서원했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 의 수도사가 되었다.
그는 30대 중반까지 가톨릭교회의 수사요, 사제, 신학 교수로 지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로 사역하면서 죄인인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칭의에 대해서 깊이 고뇌했다. 1517년 그는 로마 가톨릭의 부패를 지적하는 95개 논제를 게시했다. 그는 42세의 나이에 전직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년)와 결혼했다. 1546년 2월 18일 63세의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비텐베르크로 옮겨져 성 안의 교회에 안치되었다.
2. 마르틴 루터의 사상
1)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추기경이 루터에게 교황의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더 높으며,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의 최종적인 권위는 성서에 있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지상에서도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주장하였다.
2) 십자가 신학
루터의 신학사상은 크게 세 가지 구호로 설명된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성서(sola scriptura).” 이 세 가지 종교개혁의 구호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 있으며, ‘그리스도만으로’의 원칙이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끈이다. 루터는 고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 힘과 정복을 추종하던 당시 가톨릭교회의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는 인간에게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했다.
3) 섬김의 신학
루터는 사회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고 구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것이고, 윤리에 어긋나며, 인간 존엄성에도 어긋난다”라고 보았다. 하지만 배우자와의 사별이나 질병, 사회구조적 악 등으로 가난하게 된 사람들을 돕는 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큰 예배”라고 하였다. 그는 매주 주일마다 공동모금을 통해서 모은 돈으로 질병과 노령 등으로 어려운 시민들을 도왔다.
4) 음악과 찬송
루터는 음악이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했다. 그는 가톨릭교회에서 특정인들만 사용하던 성가를 신자들의 소유로 돌려주었다. 그는 일반 회중도 찬송을 부를 수 있게 예배 양식을 개혁했으며, 직접 많은 찬송곡을 작사, 작곡하였다. 그는 성가는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가장이 가족에게 찬송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3. 종교개혁 사상의 확산
1) 95개조 반박문
면죄부가 가톨릭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교회는 면죄부 영업에 열을 올렸다. 요한 테첼은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신자들을 기만하였다. 평소 이를 비판하던 루터는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의 교회의 문 앞에 ‘95개 논제’를 내걸었다. 그는 제95조에서 ‘여기에서의 평화의 환상보다는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2) 파문과 보름스 회의
루터는 비텐베르크 성의 엘스터 문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 법전을 불태웠다. 그후 닥쳐온 교황의 파문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선제후를 선두로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에서 루터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다. 1521년 루터는 주위의 우려와 권고를 물리치고 죽기를 각오하고 보름스로 향했다. “우리는 보름스에 입성할 것이다. 지옥의 모든 문들과 하늘의 모든 권세들이 막으려고 할지라도 ….” 루터는 황제 앞에서 결코 그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성서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다 ... 하나님이여,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국회에 죽음을 무릅쓰고 출두한 것은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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