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시대의 성령운동(10) /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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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가 순교한지 600여년이 지났으므로 후스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보다 100여년 앞선 사람인 셈이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의 개혁 정신이 유럽 대륙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1. 얀 후스의 생애
1) 선종교개혁자(Pre-Reformer) 후스
얀 후스(Jan Hus, 1369∼1415)는 보헤미아의 후시네쯔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가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프라하 대학교에서 학사와 인문학 석사 학위를 받는다. 1400년부터 대학에서 교양 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일했으며,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1401년에는 철학부의 학장을 맡고 1년 후에는 총장이 되어 체코인들이 독일과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한다. 그는 프라하 대학의 지도적인 체코인 교수로서, 라틴어 뿐 아니라 체코어로도 저술 활동을 했고, 체코어를 개량하고 체코어 철자법을 개혁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게 하였으며, 체코어로 찬송가를 보급하였다.
2) 박해와 처형
1414년 10월 스위스의 콘스탄츠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 보헤미아의 국왕 바츨라프 4세의 동생 지기스문트가 안전을 보장하면서 후스에게 종교 회의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다. 후스는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참석하였으나, 그는 콘스탄츠에 오자마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고문을 당했다. 하지만 콘스탄츠 공회에서도 뜻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1415년 7월 6일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졌다. 후스가 사형 집행 전 “당신은 지금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려 하지만 100년 후에는 불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3) 후스의 처형 이후
그의 처형은 체코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체코 땅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415년 가을에 여러 귀족들이 콘스탄츠 종교회의의 결정을 거부며, 후스의 가르침에 따라 체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결의문에 참가한 이들은 신약성서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근거하여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나누었다. 그래서 포도주를 담은 성반은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에서 얀 젤리프스키가 주도하는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이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했으며, 며칠 뒤 바츨라프 4세가 죽자 후스주의자들은 보헤미아를 장악하게 되었다.
2. 후스의 개혁 사상
1) 성서 중심의 신앙
후스에게 있어 절대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세상의 상대적 진리와 다르다. 그는 하나님의 진리는 성서를 통해 우리에게 증언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라고 역설했다. 그는 교황이나 교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중심으로 보고, 제도화된 교권주의에 도전해 근본적 개혁을 부르짖었다.
2) 회중 중심의 예배
후스는 대학 교수요,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면서 프라하의 성 미카엘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1402년에는 베들레헴 성당에서 설교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라틴어 위주의 설교에서 자국어인 체코어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단순 명료하게 설교했다. 또한 사제와 찬양대원의 전유물이었던 찬송을 회중 찬송으로 불렀다. 그는 교회활동을 금지당한 후에도 광야와 거리에서 설교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돌아갈 것을 역설했다.
3) 차별 없는 성찬의 은혜
성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고,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기억하게 해줌으로써 주님과의 참된 교제를 체험하고, 그로 인한 은혜를 받게 해주는 것이다(고전 10:16). 그런데 후스 당시에는 성찬에서 떡만 제공되었다. 체코 개혁가들은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잔을 베푸는 것을 이단으로 간주했던 당시 로마 가톨릭의 관례를 깨고 성찬의 잔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스는 성찬에서 모든 성도들이 떡과 잔을 함께 나누게 했다.
4) 교회의 평등화
그는 설교와 저술에서 교회가 타락을 청산하고 초기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프라하 대학 교수들과 왕실, 일부 귀족, 그리고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더욱이 그는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해서 청빈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소귀족들과 도시 민중뿐만 아니라 체코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또한 그는 교회 안에서 예배 공간의 차등을 폐지하는 상징적인 건물을 지었다. 직사각형 모양의 예배당을 정사각형 형태로 만든 ‘베들레헴 채플’을 조성했다. 성화나 조각상을 치우고 중앙에 설교단 하나만 설치함으로써 예배 참석자들이 모두 같은 거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했다.
3. 후스 개혁운동의 파급
후스 개혁운동의 후예들은 성서의 자국어 번역, 자국어 예식서 사용, 회중 찬송 등을 계속 장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탄압을 받고 보헤미아에서 독일 지역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친첸도르프 백작과 함께 헤른후트 형제단을 조직함으로써 그 명맥을 유지했고, 이후 형제단은 모라비안 교회로 발전했다. 존 웨슬리가 모라비안 집회에 참석해서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한 것을 볼 때, 얀 후스나 모라비안 교회가 성령의 충만한 역사에 대해 결코 무지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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