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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존 웨슬리가 회심한 로마서 서문과 오순절 성령운동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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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존 웨슬리가 회심한 로마서 서문과 오순절 성령운동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3)존 웨슬리가 회심한 로마서 서문과 오순절 성령운동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4-04-09 1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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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가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경에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회심한 후에 불타는 성령을 체험하게 된 로마서 주석 서문의 내용을 소개한다. 

 

은혜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이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부어주신다고 할 때 은혜(GRACE)와 은사(GIFT)는 서로 다르다고 하겠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호의들을 말하고 있는 로마서 5장 15절에서 이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은사와 영을 날마다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할지라도 오히려 그것들은 부족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로마서 7장 14~23절과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옛 욕망들과 죄악이 여전히 우리 속에 아른거리며 영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울이 자기 자신을 여전히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는 로마서 7장 9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과(여전히 불안전한) 은사들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어떠한 고발도 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로마서 8장을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의 육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기 시작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와 선의를 보여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죄를 보지 않으시며 그것들을 판단하지 않고 죄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갖고 있는 믿음에 따라서 우리를 다루신다. 

 

믿음(faith)은 꿈꾸는 그 무엇이나, 인간적인 환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그 용어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들의 믿음에 도덕적인 진보나 선행들이 수반되지 않음을 보면서 여전히 믿음에 관하여 많은 말을 하게 될 때, 그들은 믿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올바르게 되고 구원을 얻으려면 ‘행위들’을 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오류에 빠진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에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그들 자신의 추리력으로 그들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여기는 한 생각을 날조하여 이것을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지 사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에 상응하는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더 나은 삶을 가져오지 못한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고 했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결코 행해야 할 선행을 이미 행하고 계속해서 선행을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활동적인 사람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믿음을 손으로 더듬어 찾으며 선행을 찾아다니지만 믿음이 무엇이며 선행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믿음과 선행에 대하여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살아 있고 흔들림이 없는 신뢰이자 신앙이다. 그것이 너무 확고하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으로 인하여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 

 

이런 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뢰, 이런 유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은 우리를 기쁘고 활기차게 만들며 하나님과 모든 인류와의 관계에서 열심을 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을 통해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무엇에 내몰려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쁘게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하고 모든 사람을 섬기며 자기에게 그러한 은혜를 보여주었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곤경을 겪고자 한다. 

 

실제로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그릇된 인식들과 자기들이 믿음과 행위에 관하여 영리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터무니 없는 말을 하는 다른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들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당신 안에 믿음을 창조해주시도록 간구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이 아무리 스스로를 속이려고 할지라도 또는 당신의 노력과 능력이 무엇일지라도 당신은 언제나 믿음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의(RIGHTEOUSNESS)는 우리가 마음속에 갖고 있는 믿음과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 

 

왜냐하면 이 의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도록 사람의 본성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는 죄로부터 해방되며 하나님의 계명들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존귀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통상적인 자연적 과정 속에서 생겨날 수 없다. 아무도 스스로에게 믿음을 줄 수 없으며 불신앙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은 자신의 가장 작은 죄악들조차도 없이 할 수 있는가? 믿음이 없이 행해진 것이나 불신앙의 결과로서 행해진 것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졌다고 하더라도 거짓된 것이며 자기기만, 죄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로마서 14장 23절의 육(FLESH)과 영(SPIRIT)에 대해서 ‘육은 오로지 도덕적 불결과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 바울과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그리스도에 따르면 육은 육으로부터 생겨난 모든 것’, 즉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모든 감각을 포함하여 몸과 영혼, 자기 자신 전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육에 기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아직 받지 못한 사람이 갈라디아서 5장 19절 이 육체의 일로 묘사하면서 육체의 외식과 가증스런 행위들로 부르고 있는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영의 고상한 것들에 관하여 유쾌하게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게다가 로마서 8장 3절에는 ‘율법이 육에 의해 약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도덕적 불결만이 아니라 모든 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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