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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존 웨슬리의 계보와 생애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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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존 웨슬리의 계보와 생애 >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웨슬리운동의 역사와 사명,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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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존 웨슬리의 계보와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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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은정 작성일24-03-26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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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년대 독일의 마틴 루터의 회심과 함께 그리스도의 은총을 믿음으로 구원이 가능함을 발견한 것이 루터의 성자신학으로 성립되었으며, 1530년대 프랑스의 존 칼빈의 회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따라서 구원이 가능하다는 칼빈의 성부신학이 성립됐다.

 

1738년 5월과 1739년 1월 영국의 존 웨슬리의 회심과 함께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존 웨슬리의 성령신학이 성립되면서 종교개혁이 완성됐다. 특별히 한국에서는 칼비니스트 장로교회와 웨슬리언교회(기감, 기성, 기하성, 구세군, 나성, 예성)가 한국교회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칼비니스트 장로교회는 200개 교단이 넘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칼빈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한장총이라는 장로교연합으로 일치 단결하며 한국교회의 연합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그에 비해 웨슬리언교회들은 기감 기성 예성 나성 구세군 기하성 등 6개 교단 정도 밖에 되지 않음에도 일치 단결하지 못하고 각자도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2003년 LA 세계 웨슬리언 국제대회에 참석한 기성 교단의 양기성 박사가 2006년에 한국 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를 창설. 웨슬리언교회 연합운동을 펼쳐오면서 2014년 9월 서울신대에 웨슬리신학연구소가 설립돼다. 이어서 2023년 3월에 웨슬리언교단장협의회가 조직되어 한국웨슬리언교회 연합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이영훈 목사는 “역사적으로 감리교회가 성결교회를 세웠고 성결교회가 순복음교회를 세웠다”고 말했다. 그러기에 순복음교회(기하성)의 뿌리와 신앙의 계보를 배우고 아는 것은 마태복음에서의 족보를 이해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영국의 성공회 신부였던 존 웨슬리가 영국에서 1738년 5월 24일 성령을 체험하고 회심한 뒤에 1744년 제1회 연회를 시작으로 감리교회가 세워졌고 19세기 미국의 감리교부흥사 마틴 냅이 만국성결교회를 세우고 1865년 영국의 감리교 목사 윌리엄 부스와 그의 아내 캐서린 부스 부부가 영국 런던의 빈민가에서 구제사업을 시작한 것이 오늘의 구세군교회가 되었다.

 

1850~1890년대 미국의 감리교 부흥사 마틴 웨슬리 냅에 의해서 만국성결교회가 세워졌고 급진적인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국의 성결교회와 순복음교회가 발전하게 되었다. 나사렛교회는 1908년 10월 8일에 미국 텍사스주 파이롯 포인트에서 공식적으로 조직되었다. 나사렛교회의 초창기 지도자들이 함께 가졌던 꿈은 웨슬리주의 전통 안에서 믿는 자들의 성결과 이웃사랑의 실천을 도모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이었다.이와같이 18세기 영국의 조 웨슬리의 성령운동과 성결운동이 감리교회를 시작으로 감리교 목사들이 성결교회 구세군교회 나사렛교회를 세움으로 전 세계 웨슬리언교회 성도들은 6억명이 넘게 확산되었다, 거기에 칼빈주의 장로교도들이 아니라면 감리교 성결교 나사렛 구세군 기하성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개신교 3대 스승이며 성령신학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생애와 교훈을 배우고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기하성 교회의 사명이라 생각된다.

 

존 웨슬리는 지적 영적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세상적인 의미의 명문가가 아니라 신앙과 경건에서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명문가였다. 친가 선조들은 중세기부터 대대손손 성직자가 많았고, 학자와 의사. 문학가가 많았다. 

 

특별히 중세기를 지나면서 존 웨슬리 가문에서는 유명한 기사(chivalry)들이 많이 나왔다. 고조할아버지는 영국 남부 데븐주의 영웅적이 기사였다. 그는 경건한 신앙인이며 학식과 시문학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고루 소유한 유명한 기사였다. 존 웨슬리의 선조들은 신앙과 경건과 학문과 시와 음악과 도덕과 충성심으로 교회와 나라를 지키며 천년의 세월을 살아온 명문가였던 것이다. 

 

웨슬리의 증조할아버지 바톨로뮤 웨슬리(1595-1680)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영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었지만 청교도 신앙에 깊이 감화되어 심한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비국교도의 길을 갔으며 결국은 교구에서 축출되어 고난을 당하면서 방랑하는 성직자로 설교하고 의사로서 가난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살았다. 

 

할아버지 존 웨슬리(1636-1678)도 옥스퍼드대학에서 신학과 동양 고전을 공부하였고 천재적인 재능이 나타나 당시 청교도 신학의 대가요 옥스퍼드대학의 총장을 지낸 존 오웬의 총애를 받았다. 단순하게 학문만 했더라면 위대한 학자가 되었을텐데 그는 일찍이 청교도 신앙이 성서적이며 진정한 기독교라는 확신을 갖고서 험난한 비국교도의 길을 걸었다.

 

두 번씩이나 감옥에 갇히고 42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1662-1735)도 옥스퍼드대학과 캠브리지 대학을 나오고 여러권의 책을 저술한 학자요 시인이었다. 사무엘의 세 아들이 모두 옥스퍼드대학에서 학사와 석사를 받은 학자였으며 성직자였다. 큰아들 사무엘(1707-1788)은 명문 웨스트민스터학교의 교사와 티버튼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시인으로서 많은 시를 남겼다. 

 

셋째아들 찰스 웨슬리도 옥스퍼드대학을 나오고 존 웨슬리와 함께 일평생 메도디즘의 창시자로 특별히 실천신학자로 9,000편의 찬송가를 써서 교회사에 가장 위대한 찬송작가가 되었다.

 

존 웨슬리의 외가도 영국 교회사에서 빛나는 명문가다. 외할아버지 사무엘 아네슬리 박사(1620-1696)는 옥스퍼드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고 민법학 박사가 되었다. 그는 영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어 런던에서 대표적인 교회를 섬겼다. 그러나 선조의 신앙 전통을 따라 비국교도의 길을 택하였고 청교도의 대부라 불릴 정도로 당대로 당대 청교도 운동가인 그는 25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중에 25번째가 바로 존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1669-1742)다. 

 

수산나는 당대 여성으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청교도 경건과 신학에 정통한 여성이있었다. 만약에 그때 여자도 대학에 갈 수 있었다면 그녀는 분명히 옥스퍼드 대학에 가서 신학박사가 되어 유명한 학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말힌다. 

 

특별히 그녀는 신학만이 아니라 어학과 문학과 역사와 교육학에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자녀교육을 사명으로 주셨다고 생각하여 어릴 적부터 철저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으로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를 훈련시켰다. 


존 웨슬리의 선조들은 돈과 부에서 가난했으며 세속적인 명예와 세속적인 권력에서도 가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과 고독과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오희려 경건과 학문과 성직을 온전히 지켰으며 후손에게 거룩한 유산을 물려주었다. 실로 존 웨슬리는 우리 모두가 흠모할만하며 교회사에 길이 빛날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명문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인류의 사도인 존 웨슬리의 탄생을 예비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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