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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신앙의 뿌리를 찾아서(2) 순교자 박헌근 장로 > 최상근 교수의 청주, 충북지역 순복음교회 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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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근 교수의 청주, 충북지역 순복음교회 역사연구

오순절신앙의 뿌리를 찾아서(2) 순교자 박헌근 장로

페이지 정보

18-12-21 13:54

본문

Ⅰ.들어가는 말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와 백성의 민심이 극도로 피폐해져 어디를 보더라도 절망과 좌절뿐이었던 1953년 4월 8일, 하나님께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창립하게 하심으로 이 땅에 희망과 변화의 성령 충만한 말씀을 팔도강산에 전파하게 하셨다. 이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지난 60여년 동안 본 교단이 큰 부흥을 가져온 것은 선교사들과 목회자, 그리고 많은 성도들의 눈물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교단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시고 본 교단 최초의 순교자 박헌근 장로를 재조명함으로써 우리 교단의 과거를 진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Ⅱ.박헌근 장로의 생애와 사역
 박헌근 장로는 1914년 9월 3일 전남 무안군 몽탄면에서 부친 박민상과 모친 이영풍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박헌근은 어려서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부친 박민상에게 한문을 배우면서 성장하였다. 당시 민족은 일제의 모진 핍박과 압박 속에서 황폐한 삶을 살고 있었다. 가난한 생활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일본으로 가족을 데리고 가서 양복 기술을 배워 양복점 사업을 해서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하였다. 박헌근은 그의 나이 10세 때부터 일본 오사까시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병환으로 별세하였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정성으로 아버지 장례를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에 그의 가족은 감동하여 온 가족이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러나 어버지가 돌아가시자 급격하게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박헌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취직을 했다. 그는 남다르게 다른 사람보다 영특해서 글씨를 빨리 쓰고 영어와 한문에 능해서 다니던 인쇄소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일본에 와서 부친이 변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갑자기 가장이 되어 가족을 돌보던 박헌근에게는 박은애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동생은 오빠가 이코마 신학교 4년 동안 공부할 수 있게 학비를 지원하였다. 박헌근은 신학교에서도 남다른 영성과 기도생활을 잘해서 많은 신학생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했고, 성령 충만했던 박헌근은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구령의 열정으로 노방전도에 전심을 다하였다. 열심히 기도와 전도하던 박헌근은 질병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치료해주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서 질병과 귀신들린 많은 성도들이 고침을 받았다.

 

 박헌근은 일본 이코마 신학교 재학 중에 최예림과 결혼하고 1942년에 귀국하여 일본에서 배웠던 인쇄 기술로 대전 소화 인쇄소에 취직을 하고 대전에 집을 장만하였다. 박헌근은 1942년 대전제일장로교회 창립 때부터 주일학교 부장과 청년회장으로 봉사하면서 새벽예배와 주일학교 집회를 인도하고 기도할 때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하게 된다. 그가 기도회를 인도할 때 강대상이 진동하고 교회 안에 있던 성도들도 성령 충만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박헌근은 대전 중동제일장로교회에서 2년 동안 주일학교 부장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제일교회 장로들과 함께 대전 삼성장로교회를 창립하게 되는데, 박헌근 집사는 주일학교를 조직하여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전념하였다. 그가 열심을 다해 가르치자 250명 가량으로 주일학교는 성장하였다. 그 학생 중에는 감리교신학대학 구약학 교수와 성서공회 총무를 지낸 민영진목사가 대표적이다. 박헌근 집사는 당시에 순천에 있는 남장로회 선교부를 민영호 장로, 이종회 집사와 뜻을 합하여 순천에서 활발하게 선교하던 보혈선교사에게 진정서를 보냈다. “순천보다 교통이 좋고 우리나라 한복판에 있는 대전으로 선교부를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쓰는 일은 영어를 잘하는 박헌근 집사가 담당했다. 이에 보혈선교사가 대전을 둘러보고 수락하여 선교부를 대전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 일을 계기로 대전에 한남대학교가 세워지게 되었다.


  박헌근은 조국이 해방되자 일본인들이 물러가면서 인쇄소의 일본인 사장은 평소 정직한 박헌근 집사에게 관리위원장으로 세운 뒤 그에게 인쇄소를 맡기고 떠나갔다. 회사 자본과 규모가 상당한 사업소였지만 그는 회사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일에 열심을 다하였다. 특히 그는 동인, 동신 두 아들을 순교의 재물로 바쳤던 손양원 목사가 대전에 부흥회를 하러 오면 참석하여 은혜와 감동을 받았고 그들의 순교를 사모했다. 박헌근 집사가 고향을 다녀올 때면 속옷 차림으로 집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외투며 저고리를 다 벗어 주었기 때문이다. 마치 조선의 예수 이용도 목사처럼 그리스도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였다.


  박헌근은 삼성장로교회의 장로로 피택되었고, 1948년 11월에는 순천오순절교회 박귀임 전도사 후임으로 청빙되어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가 부임하자 교회는 뜨거운 기도와 성령운동을 통해 30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급성장 하였다. 1950년 4월 9일에는 순천오순절교회에서 박헌근 장로가 주축이 되어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가 열렸는데 허홍 , 윤성덕, 박성산, 김성환, 박헌근, 박귀임 전도사 등의 교역자를 비롯하여 약 200여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이 대회에서 박성산 목사가 사회를 보았고 박헌근 장로는 말씀을 전했다.


 박헌근 장로는 순천오순절교회에 부임한지 2년 동안 성령운동, 기도, 전도에 최선을 다해 교회를 부흥시켰다. 예배와 심방 시에 방언과 신유 등의 오순절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러나 부임한지 2년 뒤 여름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는 피난하지 않고 성도 가정을 심방하면서 주일예배에 열성을 다하던 중 공산당이 순천을 점령하고 갖은 행패를 다하기 시작하자 비밀리에 심방하고 다니던 그는 공산군 치안대에 검거되어 순천경찰서에 감금되었다. 신앙을 버리면 살려준다고 회유하는 공산군에게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며 전도하였다.


  순천 오순절교회가 순천경찰서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문당하면 부르짖는 비명과 신음소리가 성도들에게까지 들렸다고 한다. 9월에 들어서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들의 행패는 더욱 심하여져서 박헌근 장로에게 가하는 고문은 더욱 혹독해졌다. 그러던 중 유엔군이 인천 상륙과 서울 탈환으로 공산군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퇴각하던 공산군은 감금된 양민들을 대부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 때 박헌근 장로도 학교 운동장에서 총살을 당했다. 박헌근 장로와 함께 잡혀있던 순천병원장 증언에 따르면 그는 가족들과 성도들이 보내준 김밥과 옷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면서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박헌근 장로는 럼제이 여사에 의해 오순절신앙이 전래된 지 22년이 되는 1950년 9월 17일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한국오순절교회는 최초의 순교자를 낸 것이다.


  순천 오순절교회 청년 중에 후에 순복음신학교 부학장을 역임한 박종수 목사는 노래를 지어 박헌근 장로의 순교를 기렸고 다른 청년들도 그에게 감화를 받아 많은 사람이 목회자가 되었다. 박종수 목사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잘 싸웠다. 순교자여!
빛나리라 그대모습
주 위해 흘린 피는
장차 받을 영광이로다.


  양들을 지키다 노모와 처, 어린 자녀들을 두고 순교한 박헌근 장로는 노모의 피난 권유를 뿌리치면서도 교인들에게는 얼마 안 남았으니 계속 잘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삶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Ⅲ.나아가는 말
 지난 9월 8일 한국 오순절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박헌근 장로의 ‘순교 68주년 기념예배’가 그의 고향인 전남 무안군 몽탄면 순교자 묘역에서 드려졌다. 본 교단, 수원좁은길교회, 순천오순절교회는 순교기념예배를 드리면서 그의 순교신앙을 계승해 나가는 것을 매우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타 교단에 비해 짧은 역사이지만 이제 우리 교단도 한국을 대표하는 교단이 되었다. 특히 순교자를 배출한 교단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본다. 끝으로 터툴리안은 “순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다” 라고 말을 했다. 우리는 교단과 주님을 위해 순교의 피가 되어 교단 발전에 초석이 된 박헌근 장로의 신앙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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