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었던 히브리어를 살린 벤 예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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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에젤 벤 예후다는 죽었던 옛 언어 히브리어를 소생하여 사용하도록 한 주인공이다. 벤 예후다는 1858년 리투아니아의 루즈키에서 태어났다. 랍비가 되기 위하여 예시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젊은이들과 같이 종교가 아닌 일반 세상 쪽에 더 관심을 갖다 17세 때 인생의 결정적 변환인 계시를 받는다. 그것은“마치 하늘이 열리는 듯 빛나는 빛이 그에게 임하며 그의 눈과 귀에 명확한 음성이 들리어 이스라엘이 옛 땅에 소생 될 것이니라.”
이 소명은 그의 마음에 영원히 자리 잡으며 열정적 민족주의 감정으로 발전된다. 그는 유대인들의 ‘공통된 언어가 무엇일까’을 곰곰이 생각하며“이스라엘은 그들의 본향에 재탄생하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모국어를 말하여야 한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엘리에젤은 그의 이름을 벤 예후다(유대의 아들)로 개명하고 1881년 그 당시 터키가 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의 연인 드보라 죠나스를 만나 결혼하여 아들을 낳자 가정에서 일절 다른 언어를 사용치 않고 오직 히브리어만 했다.
벤 예후다 부부는 어려운 여건속에서 아들이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자유롭게 구사하는 최초의 유대인이 되게 만들었다. 엘리에젤은 예루살렘에서 친구들을 사귀며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두 개의 조직체를 만드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재 탄생그룹”과 “명쾌한 언어그룹” 이다.
엘리에젤은 그의 목적이 성공되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단결이 필요하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자녀로 돌아가야만 실현 된다고 확신하였다. 그러나 정작 정통파 유대인들은 그가 정치적 민족주의적 의도가 숨어 있다고 반대하며 그를 박해하고 파문까지 하여 벤 예후다는 정통파와의 관계가 극히 악화 되었다.
벤 예후다는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이후 곧바로 이주민 학교의 선생으로 근무하며 몇몇 과목을 히브리어로 가르쳤다. 그의 히브리어 교습은 성공적이었고 이것은 다른 교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당시에는 히브리어를 가르칠 교재도 교육법도 숙련된 교사도 모두 부족했다. 벤 예후다는 어른들이 히브리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주간신문 하쯔비(사슴)를 1884년에 발행했다.
벤 예후다가 만든 히브리어 신문은 히브리어가 종교적인 언어일 뿐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런 노력으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유대인 남자들은 어려움 없이 히브리어 신문을 소화할 수 있었다.
신문은 새로운 히브리어 단어를 소개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10년 벤 예후다는 히브리어 사전을 편찬하여 그가 죽기 전까지 6권으로 된 것을 만들었고, 벤 예후다 사후 그의 부인과 아들에 의해 1967년 17권으로 된 사전을 편찬 하였다. 이 사전의 모든 단어들은 아브라함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를 총 망라하였다.
벤 예후다가 품었던 히브리어 부활의 꿈은 당시 유대인 사회 분위기와 부합했기에 실현 가능했다. 벤 예후다가 팔레스타인에 이민 온 1881년은 초기 유대인 이민자의 물결이 시작되던 해이기도 했다. 벤 예후다와 같이 젊고 교육받은 이상주의자들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유대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탈무드 학교에서 이디쉬어로 공부하기를 원치 않았다. 동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가 예루살렘, 욥바, 리숀레찌온 등에 생겨났다. 팔레스타인에서 공통의 언어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젊은 이민자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히브리어 사용을 확산시켰다.
이들의 노력으로 히브리어는 유대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권을 갖고 있던 영국은 1922년 11월 29일 히브리어를 팔레스타인의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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