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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결산 (딤후 4:6~8)

김종현 목사(고시위원장, 순복음은성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일19-11-26 10:3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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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 후서는 바울 사도의 마지막 남긴 글입니다. 그는 머지않아 영광스럽게도 순교하게 될 것을 예상하며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인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바울 사도 자신이 임박한 자신의 죽음의 때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본문 6절에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관제(灌祭)는 제사의 한 형태로서 포도주를 부어 드리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 부어드리는 제사로 자신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처럼 벌써 부어버린 포도주는 이미 제물로 드려져버린 상태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번제에 비교한다면 제단에 올려 진 제물에 이미 불이 붙었다는  뜻입니다.  특히 자신의 죽음을 이처럼 제물에 비유했다는 것은 그가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있는 바울 사도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정리해보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각자 생각해보는 것도 앞날을 위해서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고 있지만, 우리는 한 해를 마감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생애 전체를 논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러나 지나 온 금년 한 해를 정리해 봐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생애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생애’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후회 없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도 종종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는 말을 씁니다.


후회가 없다는 것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잘했든 못했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사도가 말하고 있는 자신의 생애는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후회는 없다’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성인이라고까지 불릴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두말없이 바울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탁월한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고 그 진리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소위 기독교라고 부르는 이 종교의 시스템을 건설한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절반이 그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소수민족의 뿌리에서 시작된 이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전파시킨 사람 역시 바울 사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바울 사도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슨 권력을 누리고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편안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평생을 떠돌이로 살다시피 했습니다. 쫓겨나고 도망 다니고 숨어 지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붙잡혀 다 죽게 되도록 두들겨 맞았던 것도 셀 수 없었고, 목숨이 붙어 있는지 떨어졌는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늘 위급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월은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이런 생애를 돌이켜본다면 신세한탄이 나올 법도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말이 쏟아져 나올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후회 없이 살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원수들에게 붙들려 죽은 목숨 되도록 매를 맞은 것도 선한 싸움이었고, 파선을 당해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던 일, 강도를 만났던 일,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밤을 지새웠던 날들은 그의 마땅히 달려갈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당하다가 마침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것은 믿음을 지킨 결과입니다. 비록 몸은 병들어 고통스럽고 때로는 동역 자 들까지 변절하고 떠나가는 고독한 삶이었지만, 후회 없는 삶이었고 자랑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지막 순간의 평가가 우리 삶의 가치와 의미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지나온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고 결산해 본다면 어떤 고백이 나올까요?
과연 지나온 우리의 삶은 어떻게 살아왔나요? 정말 후회 없는 삶이었습니까? 그렇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후회스러운 일들이 너무 많았으니까요. 그렇다면 후회스러운 것은 있을망정 부끄럽지는 않은 삶이었나요? 잘못된 선택으로 후회스러운 일들이 있다 할지라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면 그래도 성적이 좋은 편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온 우리의 삶이 모습이 부끄럽지 않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는 것보다는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모습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자아반성과 자기비판을 하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선한 싸움을 싸웠는가?


인간은 한 평생이 투쟁이며 경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사업터전에서 보이지 않는 무서운 암투를 벌이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생은 생존경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하는 선한 싸움은 아닙니다. 본문의 선한 싸움이란? ajgwvn(아곤)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의 의미는 도덕적 투쟁을 말합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죄 성과 더불어 날마다 싸웠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 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지게 될 때 그 결과는 안타까울 정도가 되고 맙니다. 믿음도 버리고 교회도 등지게 됩니다 때문에 바울은 다시 (딤전 1:19 하반절)에서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반드시 싸워야 하는 싸움이 바로 선한 싸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잠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 지독한 육체의 죄성과의 싸움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히 12: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평생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웠기 때문에 누구보다 거룩함을 이루고 예수님을 본 받은 자로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요? 이기적이고 염치없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 추한 싸움을 싸울 때가 없었는지요? 나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큰 이익을 무시하며 살았다면 비겁한 싸움을 한 것입니다. 남을 무시하고 자기 혼자 잘나고 의롭다고 생각하며 행동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험악한 말을 함부로 뱉고 살았다면 매우 악한 싸움을 싸운 것입니다. 힘들고 곤궁에 처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이,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그저 내 한 몸 위해, 내 새끼들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만 최고의 관심사로 알고 아등바등 살아왔다면, 열심히 싸운 것만은 인정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사도처럼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자신의 덜 성숙함 때문에 고민하며 주님께 몸부림 쳐 부르짖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이 시대의 사회의 정의나 불의에 대하여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회정의를 말하고 불의와 탈법과 불 선을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자신을 향해 철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서는 관대함이 없으면서도 자신의 실수와 허물에 대하여는 너무 쉽게 관대하고 마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선한 싸움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을 향하여서는 철저하고 냉철해야 하겠지만 남에 대하여는 관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 생애였다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지난 한 해가 얼마나 선한 싸움을 싸운 날들이었는지 너무나 부끄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결단하고 새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선한 싸움은 우리가 주님 앞에서는 날까지 끊임없이 해야 할 우리의 과제입니다.

 

2)달려갈 길을 다 달렸는가?(사명 감당)


사도는 또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의 모습입니다. 경기에 출전한 선수에게 주어진 사명은 최선을 다해 트랙을 달리는 것입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중간에 주저앉아버리면 자기 책임을 포기하고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입니다. 멀다고 트랙을 벗어나 지름길로 가는 것은 아무런 상급도 기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열하고 악한 행동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주어진 역할과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에서의 역할이 있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부모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학생의 본분을 지키고, 국민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역할과 책임을 달리기 선수에 비교해서 말한다면, 지난 한 해,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정당하게 우리의 달려갈 길을 달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때로 시간과 여건을 핑계로 책임을 다하지 못했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것보다 중요한 책임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주어진 책임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그 나라의 백성이요 그 나라의 선전 군들입니다.


(벧전 2:9) 우리를 피로 사신 주님은 우리에게 가정과 직장과 사업 터에서 그 나라를 위해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거룩한 임무를 위한 노력과 수고와 땀 흘리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렘 48:10)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일이 무엇일까요? 주님을 섬기는 일이며 주의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3)믿음을 지켰는가?


또 사도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의 생애를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믿음은 누구나 갖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살후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행 13:48) 그래서 믿음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가 믿음을 지킨 한 해였습니까? 물론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배반한 것이 아닌 이상, 믿음을 지켰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동과 동기가 우리의 믿음에 부합하는 것이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과연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의 행위들이 거의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고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행위라는 열매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나무인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행위만 가지고 보면 믿음이 없는 사람과 아무런 차이가 없을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말씀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믿음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귀찮게 하고 힘들게 해도 오히려 미소로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고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내게 훌륭한 인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총칼의 위협 앞에서 신앙의 포기 여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그 자체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행동 하나, 말 한 마디가 우리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의해서만이 우리가 믿음을 지킨 삶이었다, 혹은 믿음을 저버린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어떠했나요? 영광과 환희를 맛본 분도 있을 것이고, 좌절과 낙망을 겪어야 했던 분도 있었을 것입니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을 수도 있고, 기가 막힌 일을 당해 분노나 슬픔을 이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들 역시 중요하고 의미가 있겠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그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같은 일을 당하고도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 슬픔 속에서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가꾸어나가는 모습을 기대하실 것입니다. 큰 기쁨과 행복에 겨운 시절을 보내셨나요? 그 달콤한 행복 속에서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드림으로써 하나님이 그 행복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있는 소망과 계획이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여러분을 안타깝게 하다가 이 한 해가 끝나고 말았습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각오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을 예민하게 깨닫고 순종할 수 있는 믿음으로 거듭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또 살아가야 할 삶을 조망해 보면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드릴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회와 부끄러운 모습까지도 모두 담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렇게 하나님께 우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고하고 바침으로써, 비뚤어진 우리의 마음 바로잡아 주시고, 굽어진 심성을 곧게 펴 주시는 하나님의 치유가 우리에게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끄러웠던 우리의 모습들을 제하시고 정한 마음을 우리 속에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차곡차곡 하늘나라의 앨범에 쌓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사도 바울 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라고 우리의 생애를 결론짓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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