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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케 호모 (요 13:12~15절) >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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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케 호모 (요 13:12~15절) > 설교




에케 호모 (요 13:12~15절)

정덕만 목사(증경총회장, 전주순복음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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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19-07-29 13:39

본문


정덕만 목사.jpg

중국 한 나라의 황제가 한번은 궁궐 밖으로 외출했습니다. 이렇게 궁궐 밖으로 나가다가 나이 많이 들어 보이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왕은 노인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노인 앞에 서서 한마디 했더랍니다. “안녕하십니까? 노인께서는 올해에 몇 살이나 되었습니까?” 노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폐하, 저는 지금 네 살밖에 안 됐습니다.”


 왕은 깜짝 놀라면서 ‘이 영감이 나를 놀리는구먼, 거짓말도 곧 잘 하네’ 생각하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보아하니 여든은 넘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네 살이라고 말하는고?”


그때에 노인은 정중하게 대답합니다. “폐하, 딱 알아맞혔습니다. 하지만 80년 중에 76년 동안 나는 왜 살아야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저, 그럭저럭 살았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만 허비하며 무엇엔가 끌려가는 것처럼 정신 없이 살아왔는데, 4년 전에야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사람답게 살자고 생각을 하고 이제는 남을 좀 돕기도 하고 남을 깊이 이해하기도 하고 최근에 와서 삶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 살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생리학적 연령이라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보다 더 나아가서는 영적으로, 아니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나이는 얼마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얼마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특히나 요즘 현대인들은 쉽게 삶의 권태를 느낀다고 합니다. 항상 자기중심적이기에 자기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기준이 되어 어찌 생각하면 당당하고 정당한 것 같이 보이지만 이것이 주는 피해가 얼마나 큰지, 쉽게 삶의 권태를 느낀다고 합니다. 이기적인 삶이 자기 합리화를 통해 변호할지는 모르지만 여러분, 이기적인 삶 자체가 자기 양심을 배반하는 것이거든요. 양심이 나를 칭찬해야 됩니다. 너는 참 잘하고 있다고, 양심의 칭찬을 받지 못한 삶은 권태롭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겁니다. 왠지 짜증이 납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살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기에 누구든지 양심의 칭찬받지 못하는 삶은 쉽게 권태롭다는 것입니다.


또 요즘 현대인은 두려움에 쫓기고 있다고 합니다. 잃어버릴까, 인정을 받지 못할까, 올라갔는데 이제 내려가야 되지 않나 하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답니다. 소유 지향적으로 사는 요즘 현실이 스스로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쫓기는 모습,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쩌다 이 신세가 되었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는 분주하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삶은 이유 없이 분주하다는데 있습니다. 바빠요. 바쁜 것이 없어도 그저 바빠요. 끝도 없이 바쁩니다. 그리고 쉼과 안식이 없습니다. 좀 쉬기도 하고, 좀 생각도 하고, 좀 멈추어서 과거도 생각해보고, 저 앞에 있는 밝은 미래도 전망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냥 내달리기만 해서 그 분주함에 쫓기는 모습입니다. 언제까지 그래야 됩니까?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지금까지는 서론이고 이제부터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독일의 젊은 신학자이자, 히틀러에게서 순교한 본회퍼 목사님의 에케 호모(Ecce Homo)라고 하는 명언이 있습니다. 에케 호모. 라틴언데요. 이 말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할 때 군중들에게 한 말입니다. 영어번역으로는 behold this man 즉 이 사람을 보라. 본 회퍼는 빌라도 앞에 선 예수님을 생각하며, 과연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서 계셨을까? 라는 관점에서 3가지의 모습을 보라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생명을 의탁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생명을 깨끗이 바쳐버렸습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든지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에 가면 되는 겁니다. 내가 죽으라고 용 써도 안 되는 것이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3년 서른세 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참 우스운 얘깁니다만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쨌든, 서른세 살 넘은 사람은 다 덤으로 사는 거예요. 너무 욕심 부리지 마세요.” 그러니까 사람은 꼭 길게 살아야 잘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짧게 살면서도 단 3년의 시간에 일을 했는데 엄청난 역사를 이루셨단 말이죠. 여러분 목숨은 귀한 것이기에 소중히 하십시오. 함부로 몸을 망가뜨리지 말고 건강하십시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맡기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열심히 제자도 섬기고 사람들도 섬기면서 보내신 분의 뜻을 다 이루셨지만,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든지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탁하셨습니다.


맛디아를 포함해서 12제자들도 자신들이 그렇게 죽을지 몰랐지만 죽음을 하나님께 의탁했기에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신 모습 아닐까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았는데, 내가 이렇게 죽나? 이것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앞에서 아무런 억울함도 표시하지도 할 수도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후속 결과를 의탁하셨습니다.  업적에 대한 결과를 완전히 하나님께 위탁해버렸습니다.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고요? 내가 한 일들이 어떻게 되느냐고요? 장차 어떻게 되는가는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모든 업적의 결과는 그대로 상납해버리셨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예수님이 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병자도 많고, 굶는 사람도 많고, 나라도 엉망이고….  특별히 생각해봅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는 지금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고서 지금 한쪽 구석에서 울고 있고,  도대체가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정말 성경을 읽으면서도 화가 나요. 어쩌다가 이런 것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수고를 하셨나? 무덤에까지 가서 우시면서 살려낸 나사로는 어째, 예수님 재판하시는 시간에 나와서 한마디 연설이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다 이렇습니다. 생각하자면 배반당하는 것이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렇게, 그렇게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러 오신 것이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할 일 많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지만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은 사도바울을 봅시다. 디모데후서에서 말합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가고 믿음을 지켰다. 그는 지금 로마감옥에 있습니다. 이제 곧 순교하게 될 것을 예감한 것 같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다 갔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 내 앞에 면류관이 있다.”


여러분, 죽음을 앞에 놓고 영생을 바라보며 달려갈 길을 다 가면서, 믿음을 지키는 일. 그 믿음의 본을 보이며 섬기는 일. 그리고 모든 것을 의탁하는 일. 이렇게 살고 죽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특별히 명예를 의탁하셨습니다. 빌라도 앞에서 얼마나 치욕스러운 자리입니까? 칭찬받는 자리도 아닌데, 죄인도 그런 자리는 피하고 싶을 건데,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죄인이라고, 저주받았다고 무슨 말로 비방을 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 하나님께 맡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목적에 맞춘, 목적에 도달하는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왔으니까. 특별히 요한복음은 구절구절이 말씀합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 심지어는 목마르다 하시는 것도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제비뽑아 옷을 가진 것도 모두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오래전부터 예언해온 성경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자신의 생애 속에서 성취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끝내야 하겠습니까? 언제 끝내면 옳겠습니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예수님의 모습처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내게 향하신 것을 다 이루는 거예요. 다 이루어가며 남은 생을 사는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주께서 부르실 때 조금도 유감없이 감사하며 어떤 모습으로 가든지 스데반처럼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주님 앞에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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